한국 근대의 대표적인 시인 서정주와 이상의 시세계를 회화로 표현한 염성순의 근작들은 장르와 장르 사이의 밀도 있는 조응을 지향한다. 총 42개 작품으로, 2007-2008년에 걸친 작업들인데, 전시는 물론 출판과도 연결된 이번 프로젝트로 자기 그림의 본전이 다 나왔다고 자평할 만큼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글을 그림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단순한 묘사나 재현처럼 손쉬워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용이함은 문학의 보조물, 가령 삽화의 경우에나 해당될 뿐이다. 회화라는 자율적 언어로 문학이라는 또 다른 자율적인 언어를 번역한다는 것은 거의 새로운 창조에 해당된다. 그것은 문장이라는 선적인 구조를 공시적인 언어인 회화로 재배열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염성순의 작업 대상이었던 시는 산문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함축적이어서, 애초부터 글귀를 그대로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도 불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시는 최종 결과물과 머나먼 거리에 있는 최초의 참조 대상이었을 뿐이다.
시에서 출발하고 그것과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계속 들볶였지만, 작품이 도달한 곳은 시가 아니었다. 작가는 ‘내가 그림을 가지고 시를 지었다’고 말한다. 사전 스케치 없이 시작하며, 이국적인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하는 과정에서 장르 간 번역은 분위기의 표현으로 변화한다. 시작은 막막하지만, 붓을 놓지 않는 끈기를 발휘하고 있으면 행운의 순간이 오고, 작업은 미지의 선율을 따고 펼쳐진다. 시와의 만남을 통해 염성순의 작업은 변화했다. 시는 참조대상이었을 뿐이지만, 작가는 그것을 자신의 깊숙한 곳까지 받아들였다.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요소는 기하학적인 선과 구상적 요소이다. 그것은 시간 예술인 문학의 선조성이 발현되고, 서사narrative의 주인공이 드러남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추상화되어 있어, ‘A는 B다’는 식의 명확한 이야기를 읽어낼 수는 없다.
염성순 특유의 물렁거리는 유동적 형상은 대조적인 요소인 선의 난입을 통해 또 다른 사건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문학의 서사가 미술의 서사로 변화하는 순간을 증거 한다. 작가는 작업 시작 전에 이상과 서정주의 텍스트를 해독했는데, 이상의 작품에서 현대인의 분열상이나 불안한 실존을, 그리고 서정주의 작품에서 자연에 대한 찬미를 읽는다. 전자는 현대문명 속의 주체가 처한 혹독한 상황을, 후자는 관능과 탐미에 열중한다는 것이다. 분위기로 보자면 이상은 겨울을, 서정주는 봄과 비교할 수 있다. 서정주의 당대성이 토속이나 풍물 같은 소재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면, 이상의 당대성은 보다 현대적이다. 새로 도입한 기하학적 선의 요소는 이상의 모더니즘과 관련된다. 이상 관련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기하학적 요소는 서정주 관련 작품에서는 [박꽃 시간](2008)에서 유일하다. 가운데에 여백을 남긴 산수화 같은 이미지인데, 기하학적인 선이 창처럼 드리워져 있다. 여기에서 기하학적인 선은 뭉글거리는 형상을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다.
먼저 서정주 관련 작품에서 두드러진 것은 자연의 풍요로움이다. 작품 [귀촉도](2007)에서 물과 산이 연상되는 풍경 속에 담긴 알(배)의 이미지는 다산을 연상시킨다. [침향](2008)은 분홍 빛 달을 품고 있는 검은 산으로, 아래로부터 분출되는 기운이 억겁의 세월을 순환하는 영혼을 표현한다. [상가수의 소리](2008)에서는 소리가 하나의 핵에서 온 우주로 퍼져나간다. 여기에는 자연이라는 신전에서 색, 향기, 소리의 조응을 느꼈던 보들레르적인 비전이 내비친다. 자연적 풍요가 나타나는 또 다른 방식은 관능이다. [곱게곱게 씻기운 꽃이 피었다](2008)는 에로틱한 핫 핑크의 토속적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진달래 빛 출렁이는 이미지로 넘치는 관능을 표현하고 있으며, [진달래 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벽](2007)에서는 붉은 색 기운으로 충전된 사랑의 거처에서 한 쌍이 만나는 광경을 표현했다. [즘생스런 웃음은 달더라-입맞춤](2007)은 혓바닥 같이 나풀거리는 흰 막이 성애적 환상으로 가득하다.
서정주 관련 작품에서 자연은 여성의 관능과 중첩된다. [동천](2008)에서는 햇빛이 닿을 듯 말 듯 한 심해 속에 흐드러지게 퍼져있는 여성의 이미지가, [소자 이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기운](2008)은 깊은 계곡 속에서 흘러나오는 유출물이 매혹적이면서도 역겨운abject 여성적 섹슈얼리티를 표현한다. 작은 해골 같은 형상이 몰려있는 [석녀 한물 댁의 한숨 1](2008)은 말라버린 생명의 이미지이다. [석녀 한물 댁의 한숨 4](2008)에서는 노랗게 바랜 색과 응집되지 않고 풀어진 형상이 또 다른 불임의 이미지이다. 피눈물 흘리는 동공을 그린 [문둥이] (2008)에서는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한의 정서가 흘러나온다. 누르스름한 산 깊숙이 박혀있는 해골을 그린 [자화상](2008)과 타래머리를 얹은 환한 얼굴이 떠있는[화사](2007)는 자멸과 자존감 사이에서 큰 폭으로 진동하는 복잡한 자아를 보여준다. 불상의 손 자세를 뒤로하고 떠있는 소녀의 이미지인 [신부](2007)는 눅눅함보다는 신비로움이 강조된 여성상이다.
이상 관련 작품에서는 염성순의 작품에서 잘 보이지 않던 기하학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작가의 이전 작업에서 수평선 외에 직선의 요소를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기하학적 요소는 근대성과 관련된 것으로, 식민 치하의 근대라는 비극적 상황과 병약하고 불행했던 개인사를 가진 지식인의 자의식을 반영한다. 냉랭한 공기를 전달하는 밝은 다각형이 그려진 [극한이 혹처럼 방을 누른다-화로 중에서](2007)의 분위기는 화면 상단의 불길한 검은 깃발로 반복된다. [시체도 증발한 다음의 고요한 월야-공복](2007)은 길, 건물 등이 중첩된 밝은 기하학적 형태가 검붉게 퍼져 있는 공기 사이에 떠있다. 이 작품 속의 분홍색 달은 서정주 관련 작품에도 등장하지만, 기하학적 요소와 병치되면서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동적 형태 사이의 기하학적 요소는 [시제15호-1](2008)처럼 상황을 돌파하려는 뾰족한 말단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시제15호-2](2008)처럼 인간을 가두는 겹겹의 사각형이 되기도 한다.
이상 관련 작품에서 거울은 고립되고 상처받고 분열된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거울](2007)은 둥 떠있는 둥근 거울 안에 갇힌 사람을, 또 다른 [거울](2008)은 반으로 쪼개진 분열된 두상을 보여준다. 한쪽 면은 불이 나고 한쪽 면은 공중으로 갈갈이 해체되고 있다.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 보아도 조용한 세상-명경](2007)은 하나의 검은 점 또는 혹성에서 발산된 거대한 실루엣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머리 쪽에 피가 흐르는 반영상은 밝은 색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되는 도시문명에 속해 있다. 외곽에 절단된 프레임이 둘러쳐진 [명경 1](2008)은 가운데가 텅 비어 있어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풍경 같다. 그것은 거울 반영상이 가지는 상상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명경2](2008)는 화면 깊숙한 곳에 박혀있는 사각형에서 뻗어 나온 원근법적 선 주변에 놓인 나풀대는 형상들로, 관객을 거울 뒷면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서정주보다 이상의 시세계에 더 공감했다는 작가는 기하학이라는 적극적인 조형적 요소 외에, 서사의 화자라 할 만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작품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꽃나무](2007)는 다양한 계조의 녹색 바탕에 노란색 덩어리가 하나의 지점에서 부글부글 발생한다. 그러나 그 지점의 토대는 불확실하다. 픽토그램 형태로 추상화된 인간들은 중력을 무시하고 있으며, 서로 만날 수 없는 방향으로 배치된다. 시와 세상, 그리고 시인이 만나기 위한 고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병든 몸을 가졌던 이상의 작품에는 분열과 해체의 이미지가 빈번하다. 거울은 이를 표현하기 위한 매개가 된다. 책상--[네 거짓말을 적은 편지를 데스크에 놓아라-무제](2008)--이나 문같이 거울 프레임을 가진 소재 또한 그러하다. 작품 [문을 열려고, 안 열리는 문을 열려고-가정](2007)은 추상화된 사람이 집의 불을 끄는 장면이다. 창녀 파트너와 함께했던 가정의 분열상이 닫힌 문으로 표현된다. 불행한 가정사, 그리고 빈곤과 병에 시달린 요절 시인 이상은 저주받은 천재라는 근대 예술가상을 대변한다.
[공복](2007)은 내시경에 비친 듯한 몸 내부의 풍경인데, 진달래 빛 심연 속에 푸른색 형상이 드문드문 떠있는 풍경이 건더기 없는 국물을 떠오르게 한다. [나의 폐가 맹장염을 앓다-1931년 작품1번](2007)은 붉은 색 바탕의 온기어린 몸 이미지 위에 강력하게 새겨진 문자 형상이 이물감을 준다.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1931년 시제 1번](2007)에서도 불길한 검은 기호들이 아래로 축 처지는 어두운 형상과 함께 임박한 종말을 상징하고 있다. [모형심장-시제 15호](2007)는 붉은 심장 모양 옆에 그 안에 사람이 갇힌 기하학적인 하얀 심장을 병치시켰다. 그러나 죽음의 임박함은 삶에의 욕망을 더욱 강하게 일깨운다. [꽃이 향기롭다. 나는 거기 묘혈을 판다-절벽](2007)에서는 널리 울려 퍼지는 유기체적인 곡선과 지하 석실묘로 환원되는 기하학적 선이 병치된다. [내가 결석한 나의 꿈-시제 15호](2008)는 도시를 상징하는 기하학적 형상에서 멀리 뻗어 나온 선에 놓인 해골을 보여준다. 도시에 내포된 공포를 표현한 오감도를 형상화한 작품 [제1의 아이가 무섭다고 그러오-오감도; 시제1호](2007)는 층층의 계단이 산재한 도시 뒷골목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백색 공포를 그린다.
이러한 분위기는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생생한 울림을 주는 이상의 모더니즘적 요소이다. 조형적 언어에서 모더니즘을 대변하는 기하학적 요소는 선으로 나타날 때는 어두운 색으로 면으로 나타날 때는 밝은 색으로 나타난다. 어느 경우이든 기하학적 요소는 화면 앞쪽으로 당겨져 있어 회화의 평면적 조건을 강조한다. 그러나 시작과 종말을 예견하는 두 작품에서 기하학의 요소가 다시 사라지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총구](2007)는 블랙 홀 같은 검은 구멍과 지평선 위로 뿜어 나오는 붉은 줄기를 보여주고, [아침](2007)은 수평선 뒤로 해의 모티브가 거대한 꽃으로 변모하면서, 심연에서 피어오르는 에너지와 조우한다. 고난에 찬 여정으로 은유되는 인생의 과정은 문명(기하학)이나 타인(픽토그램)같은 구체적 도상과 얽혀있지만, 생과 사는 형이상학의 문제이며, 다시금 시작도 끝도 없는 뭉글뭉글한 세계로 침잠 또는 도약하는 것이다.
선적 연속성보다는 그 절개 면을 통해 이야기해야 하는 회화로서는 전(기억)과 후(기대)가 내포된 함축적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문학적 주제를 조형언어로 표현함에 있어, 염성순은 자신의 작품을 투명한 창이나 거울로 삼지 않았다. 하나의 의미로 귀결되는 모방과 환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다. 작품에서 회화의 매체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바로 색채이다. 소품도 뒤덮인 물감 층으로 묵직할 만큼 여러 겹으로 칠해지고 지워지고 다시 칠해진 색채는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색이 되고, 마찬가지로 시작도 끝도 불분명한 채 휘몰아치는 복잡한 선들과 어우러진다. 그것은 선조성보다는 공시성이 강하여 문학보다는 음악에 더욱 가깝지만, 매체의 순수성을 구가하는 각 장르의 현대성을 통해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 재현적 요소로부터 해방된 색채와 형태는 이념이나 개념이 아닌, 보다 직접적인 감각에 호소한다.
흘러갈 방향이 결정되지 않은 연기처럼, 향기처럼, 또는 소리처럼 퍼져나가는 염성순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분위기를 통한 암시이지, 구체적인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다. 주제보다 매체를 강조하면서 미술의 순수주의를 주장했던 강조했던 비평가 그린버그는 논문 [더 새로운 라오쿤을 향하여]에서 현대 회화의 조건을 정의했다. 여기에서 그는 캔버스의 직사각형 형태의 영향을 받아 형태들은 기하학적이고 단순화되어가는 추세에 있다고 말한다. 화면은 그자체가 깊이의 효과를 내는 가상의 면들이 캔버스의 물질적인 평면 위에서 만날 때까지 평평하고 얇아진다. 캔버스의 표면에서 가상의 면들은 맞물리거나 투명하게 서로 겹쳐진다. 화가가 실제 대상을 보여주고자 하는 경우, 그 대상들의 형태는 조밀한 이차원적 상황 속에서 평평하게 펼쳐진다. 사실적인 공간은 조각나고 평평한 면들이 된다. 입체파에서도 나타났듯이, 현대회화는 사실주의적realistic 환영이 아니라, 시각적인optical 환영을 창조했다.
염성순의 작품에서 거울이나 문, 창문으로 나타나며 형식적 차원에서는 캔버스 틀을 반향 하는 선적 요소, 그리고 도시 등을 상징하는 중첩된 반투명 다각형 형태는 미묘한 색채와 더불어 회화의 매체적 특성을 강조한다. 물론 작품의 참조대상이 되었던 시들 역시 모더니즘과 관련된다. 서정주와 이상의 시는 순수시로, 마찬가지로 전통적 의미의 주제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그린버그는 같은 논문에서 시를 주제로부터 구출하여--그가 말하는 현대시(=순수시)의 요건인--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려면 단어들을 논리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시는 여전히 의미의 가능성들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단지 가능성들일 뿐이다. 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효력, 즉 의미의 테두리에 접근만하고 결코 그 선을 넘지 않음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으로 의식을 동요시키는 효력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시인과 화가는 독자 혹은 관객의 의식에 직접 작용하여 감동을 만들어내려 한다.

시나 회화의 내용은 그것들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나 관객에게 영향을 주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분명히 실현 불가능한 하나의 이상이지만, 작가가 매체의 잠재성을 얼마만큼 최대한 펼쳐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 후 그린버그의 논리는 형식주의를 교조화 하는데 활용되곤 하였지만, 정작 당사자는 논문 말미에 추상미술이 영원히 보편적인 규범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오늘날 예술을 비롯하여 모든 분야의 형식주의를 무너뜨리는 담론으로 정신분석학이 대두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정신분석학 담론을 활용하여 염성순의 작품에 나타나는 기호와 육체의 진실에 관련된 문제, 즉 언어의 문제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언어는 주체가 살아갈 수 있는 고유한 자리로 정의된다. 작품이라는 텍스트는 그 고유한 자리를 주체가 어떻게 구축하는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말랑말랑한 육체의 흔적으로 가득한 염성순의 작품은 육체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질문도 파생시킨다.
이 문제는 최초의 참조대상이었던 이상이나 서정주의 작품에도 적용된다. 독자와 관객은 작품에 나타난 기표를 통해 이상, 서정주, 염성순이라는 세 작가가 말하려 하는 진실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동요하는 언어 속에는 육체와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염성순의 작품에서 일정한 형태 없이 부풀어 오르거나 물컹거리는 형상들은 육체적 요소를 상기시킨다. 반면 이 전시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 선적 요소는 강력하지만 수동적으로 퍼져있는 유동적 요소와 상호작용 하면서 화면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마치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처럼 서로를 견제하면서 고양시킨다. 기하학적 형태는 유동적 형상을 압박하고 가장자리로 밀어내곤 하지만, 이 유동적 형상을 통해 자신을 지탱하고 에너지를 공급받는 듯하다. 기하학과 유동적 요소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처럼, 자기 보존 본능과 성충동의 대립,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의 대립 또한 서로가 서로를 가리키며 공존한다.
상상의 세계와 상징체계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현실 또한 마찬가지이다. 염성순의 작품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는 관념을 거치지 않고 몸에서 직접 꺼낸 듯한 형상이다. 그것은 어떤 명확한 형태를 취하면서 하나의 의미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마술적인 변모 과정을 거치면서 말의 원초적 질료를 형성한다. 언어적 상징은 밑바탕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언제든 때가되면 용출될 준비가 되어 있는 물질적 기질과 맞붙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분열과 단절이라는 위험을 안고 있다. 언어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는 이 물질적 기질은 정신분석학자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기호계le semiotique와 비교될 수 있다. 기호계란 욕망과 의사소통의 전(前)기호, 전(前)조건, 또는 그 기층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언어 표상의 장 안팎에서 작동하는 심적, 육적 각인들이다. 그녀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기호계를 유모나 모성같은 불안정한 원초적인 수용기와 비교한다. 그것은 태초의 물질이 구성되기 이전의 가변적 터전이자, 카오스가 생성운동을 전개하는 장이다.
염성순의 작품에서 그것은 형상적 표상의 기저에 있으면서 형상이 형성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그것은 수와 형태 이전의, 무정형적이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것, 표상불가능하고 예측불가능하며, 유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의미생성의 과정으로서 주체를 산출하는 장이라는 기본적 기능을 가진다. 이질적 충동으로 가득한 기호적 육체는 욕망의 출처이자 궁극적으로 말하는 주체를 생성한다. 화폭은 의미를 생산하는 물질의 끊임없는 분열이며 주체가 생성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현실과 상징 사이에 있는 것이 상상imaginary이다. 그것은 거울로 매개된다. 특히 염성순은 이상 관련 작품을 통해 거울과 대면한 주체를 상당수 표현하였다. 조각난 육체를 가상적으로 통일하는 거울상은 주체의 분열을 예기한다. 라깡은 자신이 통일되었다는 것을 거울 속의 자신의 복제를 봄으로서 깨닫는다는 점이 거울의 역설이라고 지적한다. 요컨대 통일된 자아는 자신과 거울 속의 영상이라는 분열된 주체를 전제한다.
자아관념은 기본적으로 상상(허구)에 기초한 관념이다. 자아는 거울단계에서 거울상과 동일시함으로서 생겨난 구조이며,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소외되어 유사자로 변형되는 장소이다. 켈리 올리버는 크리스테바의 연구가 라깡의 거울을 통과하는 여행이고, 그 심연을 따라 거울 뒤/ 너머--전(前)정체성의 시대--의 모성적 육체를 마주하는 곳까지 가는 여행이라고 평가한다. 자아가 상상적인 형성물 이라면, 주체subject는 상징계의 산물로서, 언어나 이데올로기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이다. 상징symbolic계는 아주 단순하게 언어 그 자체, 그리고 언어를 본떠 구조화된 상징체계라고 이해되는 문화의 전 영역으로 정의된다. 상징계란 의미화, 즉 사회영역의 질서로서, 명명과 통일을 담당한다. 라깡은 주체가 이러한 인식의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떤 세계, 심지어는 어떤 지각조차 한 순간 이상은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한다.
크리스테바 역시 상징적 질서 없이는 사회도 인간의 삶도 사랑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정신이상과 정신착란, 또는 무정부만 가질 뿐이다. 아무리 억압적이어도 예술은 상징(언어)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계가 보증하는 정체성은 사회의 언어적 질서의 결과물일 뿐이며, 예술이 끝없이 도전하는 것은 그 완고한 구조의 경계이다. 염성순의 작품 역시 현대 정신분석학의 가설처럼, 물질적 신체나 충동의 힘이 의미 내부에서 완전히 억압되지 않고 꿈틀거린다. 여기에서 말하는 육체는 구문의 질서가 아니라 멜로디와 음악에 가까운 것이다. 일순간 자족적인 완성 감을 보이는 환상적 형상들은 기호적 충동의 힘과 상징 사이의 연결이 성공적이었음을 예시한다. 충동이 표상에 고착되지 않고 활성화시키는 이러한 유동적 매개 고리들은 기성의 언어와 문화 안에서도 새로운 내용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