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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 / 시간의 흐름을 각인한 중층적 표면들

이선영

금년에 제작된 최근작 중 20여점이 걸린 이번 전시는 ‘기호의 둥지’ 시리즈로 구성된다. 녹슨 금속판 같은 느낌을 주는 바탕은 캔버스 위에 아크릴로 칠해진 것이다. 그 위에 금속 가루로 형상을 그리고 녹을 슬게 하여, 오래된 사물 같은 효과를 준다. 작품마다 밝기의 차이는 있지만, 그린과 블루의 중간 정도 되는 오묘한 바탕색은 작업실 앞마당을 뒤덮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로부터 왔다.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는 식물들은 황토로 마감된 작업실 벽면과 보색 효과를 가지는데, 이는 작품에서 녹슨 금속의 색조와 에머랄드 빛 바탕면의 대조로 구현된다. 그것은 그의 작품이 오래된 인공물이나 자연으로부터 온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생동감 있는 대조를 보이는 두 색상은 서로의 날카로운 경계면을 마주하는 생경한 대비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난 듯 자연스러운 뒤섞임을 보인다.

아크릴로 칠해진 캔버스 표면에 얇게 바른 금속가루는 시간이 흐르면서 부식한다. 따라서 작품은 그것이 완결되는 과정에서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재료 선택은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지향하면서도 결국은 인공물이라는 점을 상기 시킨다. 이상봉의 작품에 나타난 기호적 형상 또한 그러하다. 유적지에서 나온 도편들, 갑골문자 같은 고대 문자, 기호를 유추하게 하는 흔적들, 바위나 조약돌에 새겨진 선과 질감으로부터 나온 형상들은 형태와 무늬의 중간 정도 되는 상태로 남아있다. 작가는 세계 각지의 유적지와 고문서 등에서 영감 받지만, 그것을 직접 보고 그린다기 보다는 마음 속 깊이 넣어두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오는 무의식적 이미지를 화면에 고착시키려 한다.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 또한 재현적 이미지라기보다는, 기호처럼 단순화되고 변형된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기호는 매우 근접해 있다. 기호나 상징의 근원인 자연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식물 이미지 역시 살아있는 자연이 아니라, 오랫동안 눌려 바닥에 밀착된 고대 화석의 이미지이다. 그것들은 기호나 기호의 파편들처럼 평면적이며, 식물이 광물화 된 것이다. 그 사이사이로 발자국 등 동물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작품은 마치 화석처럼 오랜 시간의 흐름을 한 화면에 중첩시킨다. 그것은 이전 작품의 제목처럼 ‘기호의 흔적’이자 ‘생의 흔적’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 [기호의 둥지] 시리즈에는 잎, 깃털, 홀씨, 꽃, 새 발자국, 점의 무리, 나뭇가지, 열매, 세포분열의 이미지 등이 번진 얼룩과 어우러져 나타나는데, 각 대상은 나름대로 형태를 유추할 수 있지만, 대상이 가지는 스케일의 기준과 차원이 모호하다.

그것은 명확한 전사보다는, 상기와 상상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전 작품에서 암각화나 화석 같은 고고학적 이미지는 보다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가령 작품 [고래](2006년)는 고대의 암각화 등에 새겨진 형태가 분명히 존재한다. 90년대의 그의 작품 중에는 수수께끼 같은 기호가 새겨진 유물의 이미지를 입체로 만든 것이 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탁본으로 찍기도 했다. 이전 작품은 작가가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대상을 구체화하려는 모방 충동이 작품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작품 [들풀], [식물]. [잎] 등에는 풀, 나무, 잎 새 같은 구체적 형태 뿐 아니라, 상하관계가 분명하다. 화면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지면과 중력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중력의 방향이 모호한 작품은 [기호의 집] 시리즈처럼 우주적인 풍경을 연상시키는 경우이다.




이 작품들은 별의 위치가 점으로 표현된 듯한 기하학적 형태나, 점이 선으로 이어져 별자리 같은 형태를 이룬다. 여기서의 얼룩은 성운이나 성단과 유사하다. 동분과 철분이 모두 쓰인 작품 [대화]는 등장 이미지들 사이에 서사적 관계가 유추되기도 한다. 문자 특유의 가지런히 배열된 상태가 흩어지지 않은 작품 [기호의 둥지] 또한 재현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나온 [기호의 둥지] 시리즈는 보다 열린 구조와 관계망을 통해, 이전 작품에 잔존해 있던 일차적 참조대상과의 거리를 더욱 늘렸다. 해독 불가능한 고대의 문자적, 자연적 형상이 명멸하는 작품들은 의미의 읽기 보다는 선, 얼룩, 획, 두께 같은 촉각적 감각으로 향유할 것을 제안한다. 이 고풍스러운 작품들에는 한때 인류가 공유하던 소통의 매개물이 등장한다.

시간의 흐름은 꽉 짜여진 필연적 인과 고리를 느슨하게 하고, 켜켜이 우연성을 개입시킨다. 이모티콘 등, 현대인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많은 약호들 역시, 이러한 시간의 시험에 예외가 되지 않을 것이다. 기호나 자연적 형태는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 파편화되고, 형태를 유지하는 힘을 잃고 입자로 변하면서 주변으로 번져간다. 작가는 중첩된 얼룩의 농도를 틀리게 함으로서 시간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각인한다. 기호의 파편과 얼룩이라는 요소는 [기호의 둥지]와 비슷한 제목인 [기호의 집](2004년) 시리즈에서도 나타난다. 녹슨 형상들 뿐 아니라, 바탕화면 역시 고서에서 발견되는 번지기와 뿌리기의 효과가 남아 있다. 녹슨 얼룩은 습도 등 대기의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상봉의 작품은 형상이나 바탕이나 중층적인 효과를 가진다. 그러나 형상과 바탕의 관계가 고정된 것은 아니다.

푸른빛 바탕 면이 형상이 되고, 녹슨 부분이 바탕이 되는 역전된 작품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작품은 이전 보다 더 개방적인 구조를 가진다. 형상이든 얼룩이든 화면 가장자리에 의해 잘린 작품이 많이 있으며, 자족적인 소우주 같은 닫힌 작품을 거부한다. 각 작품은 미지의 전체 중의 임의적 일부처럼 보인다. 기호나 기호의 파편들 이라는 요소는 유물이나 화석 등에서 나온 것이지만, 원본들처럼 고착되지 않고 떠돌아다닌다. 물론 실제로 움직인다기보다는 원본이 가졌을 의미의 표류를 가시화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계산된 구조와 중심을 가지지 않고, 바깥으로 밀려 나간다. 거기에는 기호가 있지만, 명확한 의미와 이야기가 없다. 자연은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으로 변모한다. 꽉 찬 것보다는 비워둠이 두드러진다.

작품 [기호의 언덕]처럼 기호들이 엉켜 응집체를 이루기도 하지만, 완전히 닫혀 있지는 않다. 비슷한 이미지가 이 작품에도 저 작품에도 등장하곤 하지만, 그것은 차이를 둔 반복이다. 신비적이기는 하지만 관념적이지 않은 이상봉의 작품은, 추상도 재현도 아닌 형상성이 두드러진다. 파편적인 기호들이 명멸하는 그의 작품은 알레고리적인 특성을 보인다. 크레이그 오웬스는 [알레고리적 충동]에서 알레고리적인 작품에 대해 적용되는 패러다임이 수정한 자국이 역력한 거듭 쓴 양피지라고 지적한다. 알레고리는 항상 이와 같이 불완전 한 것, 단편적인 것, 미완성의 것과 친근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친밀성은 유적에서 가장 포괄적으로 나타난다. 그 논문에 의하면 유적은 돌이킬 수 없는 해체와 부식의 과정으로서의, 기원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져가는 것으로서의 역사를 의미한다.




알레고리에서 이미지는 상형문자와 같다. 말하자면 알레고리는 수수께끼 그림이며, 구체적인 이미지들로 구성된 글이다. 오래된 상형문자에 대한 오독은 종종 새로운 글쓰기로 나아가곤 한다.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의 혼합은 모든 미학적 매체와 수사적 범주를 혼합하는 알레고리의 한 측면이다. 수수께끼 같은 고대의 문자를 전용할 수 있는 것은 기호가 처음부터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완전함이 변화를 낳는다. 이상봉의 작품에서 의미로부터 떨어져 나간 기표는 고대적 형상을 현대적 패러다임에 접근시킨다. 세계는 방대한 기호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독해 가능성은 불확실하다. 동요하는 기호는 자율성과 초월성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성을 긍정한다. 그것은 상실되거나 불분명하게 된 원래의 의미를 보존하거나 복원시키지 않으며, 단지 그 이미지에다 또 다른 의미를 덧붙일 뿐,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기호 및 기호의 흔적들로 이루어진 이상봉의 작품은 기호가 그러하듯이 그 밖의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고는 있지만, 어떤 명확한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의 작품에는 자연적 형태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그것이 표시하는 것과 비슷한 기호, 즉 도상icon적 기호의 특성을 가진다. 그것은 유사성에 의한 연관이며, 지표index와 상징symbol 유형과는 구별된다. 퍼스의 기호 이론에 의하면, 지표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특징으로 하며, 상징적 기호가 지시체와 맺고 있는 관계는 자의적인 사회적 합의에 연관된다.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는 기호와 달리,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의미작용의 연쇄 망을 어느 정도는 한정한다. 이처럼 코드화된 대상과 시각적 이미지의 차이가 있지만, 이상봉의 작품은 고대의 상형문자처럼 언어와 픽토그램이 연관됨으로서 양자의 간극을 좁힌다.

그의 작품은 해석의 대상이기 보다는 복잡하게 짜여진 텍스트처럼 호기심을 유발하는 기호로 작용한다. 텍스트로서의 예술작품은 저자가 새겨놓았을 법한 본래의 의미를 되찾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의미를 생산한다. 바르트가 제안한 텍스트라는 의미는 그 이후 확대되어 ‘기호의 무한한 놀이를 통해 의미를 산출하는 모든 담론을 가리키게’(조셉 칠더즈) 되었다. 특히 그것은 해체deconstruction와 연결된다. 이상봉의 텍스트는 중심이 있는 구조가 아니라, 느슨한 놀이의 장으로 현시된다. 텍스트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 주변은 모든 방향으로 확장된다. 그의 작품들은 어떤 바탕을 임의적으로 잘라놓은 듯, 화면 바깥으로 흘러가는 형상들은 고정된 중심을 전제하지 않는다. 중심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기원, 목적, 혹은 정점(定點)으로 기능하여, 구조를 한 전체로서 균형 잡고 조직하며, 구조의 놀이를 제한’(데리다)한다.

반면 차이를 둔 반복은 일련의 계열series을 이루며, 사물을 지배하는 명칭으로서의 기호나 정교한 구조가 아니라, 이질적인 표면의 수많은 교차점으로 드러난다. 이상봉의 작품 속 기호는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정확한 위치가 정해지지 않는 얼룩과 흔적은 차이의 또 다른 방식이다. 그것은 데리다의 용어 차연diffèrance에 나타나는 바와 같다. 다름과 지연이라는 의미를 모두 가진 차연은 근거와 자기동일성을 와해시킨다. 사물과 의미가 자기동일성의 상태가 아닌 차이적 관계라면, 그것들은 항상 결핍되어 있으며, 보충을 필요로 한다. 근원이 부재하므로, 이를 보충하는 움직임, 반복하는 가운데 변화하는 운동이 야기된다. 텍스트는 차이적인 그물망, 즉 끝없이 자기가 아닌 어떤 것, 다른 차이적 흔적들의 직조물이 된다.

차이는 동일성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는다. 반대로 차이가 동일성을 가능하게 한다. 해체적 사고는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부터 차이화 되는 것만큼 그것이 되며, 또한 다른 것을 연기하는 것만큼 그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얼룩과 흔적으로 점철된 중층적 표면들은 차이, 즉 시간의 흐름을 각인한다. 명확한 공간적 구조에 끼어든 시간의 흐름은 불확정성을 내포한다. 기호는 다른 기호들과 뒤섞이며 얼룩에 의해 흐릿하게 변해 있다. 기호에서 번져가는 또는 기호를 부분적으로 가리고 있는 얼룩은 기원의 부재를 새삼 강조한다. 은폐되거나 망각된 의미는 복원가능하지 않다. 남아있는 것은 흔적일 뿐이며, 그의 작품에 나오는 홀씨나 씨앗처럼 표류하면서 흩어진다. 그의 작품은 언어의 상징적 질서로부터 빠져 나온 불투명성에 대한 매혹이 있다. 그것은 변칙적이고 무의미하다고 간주된 것들이 실제로는 모든 언어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조건임을 예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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