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2-11.30 갤러리 팩토리
전시장에 들어서자 보이는 작은 모니터에서는 5개국 7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실행한 프로젝트가 상영된다. 권혁의 [moving project] 중 ‘움직이다’ 편은 59초짜리 동영상으로, 등신대의 둥근 원판을 들고 움직이는 익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화면에는 얼굴이 나타나지 않고 이동하는 발만 움직이는데, 반짝이는 특수 필름지로 덮인 둥근 판은 햇빛을 난반사한다. 경쾌한 음악에 실린 사람들의 종종 걸음이 유머러스하다. 이 빛나는 원은 단순한 형태이면서도 강력하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부여잡는다. 그리고 작가의 제안에 흔쾌히 참여한 거리의 사람들에게도 큰 부담을 주지 않는 즉흥 퍼포먼스이다. 뉴욕, 베니스, 프라하, 서울 등 국내외 다양한 도시를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원은 세계인들과 예술적 아이디어를 나누고 소통하는 권혁의 작품 기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동하는 중인 빛나는 원은 편집 과정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넘어서 동시 다발성이 부여된다.
권혁의 ‘나누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벽면 가득히 설치 작품으로 구현되어 있다. [250인의 아이디어]는 우리나라의 전통문양을 작품으로 만들어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나 생각을 수집하여 개념화 한 것이다.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던 전통문양들은 맞은 편 벽면에 또 다른 작품으로 완성되어 있는데, 일명 용문양(도깨비), 연화문 이미지를 여러 겹 둘러싸는 노방천은 일루전 효과 때문에 문양에서 발산되는 기(氣)처럼 느껴진다. 가운데에 자리한 용(도깨비) 문양은 본래보다 더욱 옵티컬하고, 양쪽의 연꽃 문양은 미묘한 파장을 발산한다. 이것들은 영상 작품 [움직이다]에 나오는 빛나는 원처럼, 복잡하지 않은 장치가 보태어져 강력한 시각 에너지를 방출한다.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다. 직접 제작한 우리 전통문양이 프린트된 조각보작업과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형식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설문을 통해 수백 명으로부터 답변을 들었다. 그 중 50개의 단어를 발췌하여 벽면에 텍스트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인터렉티브한 사운드로 재구성 한 것이 [250인의 아이디어]이다.

한국의 전통 문양을 본 느낌들은 작가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가령 ‘비온 후 뜨거운 태양이 내려 죄는 사막’,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어떤 기운’,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천마리의 전갈’, ‘소의 머리를 가진 사자’, ‘광기’, ‘러브’, ‘음악’,‘ 새해‘, ‘강한 의지’, ‘행복’, ‘편안함’ 등등. 영어 단어로 이루어진 글자들은 참조 및 지시대상과 무관하게, 사람마다 느끼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성이 표현되어 있다. 우리 전통 문양을 접해보거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수집한 해석들은 다양했다. 월드 와이드 웹 시대에 걸맞게 온 라인 네트워크도 동원되었다. 올 초부터 1년간 만난 세계 각지의 사람 300여명에게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설명하느라 힘들었지만, 놀라운 답변을 많이 수집한 것은 큰 성과였다고 작가는 말한다. 벽면에 설치된 작품은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수집한 것 중 작가에게 큰 여운을 남긴 말들이 실, 철사, 침 핀 등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줄 사이를 채우는 문자를 기본으로, 철사가 엮여 생긴 음영, 철사 위에 실이 엮여 생긴 복잡한 형태, 벽면 위에 직접 쓰여진 글자 등, 여러 재료를 활용하여 다양한 텍스추어가 만들어진다.
작가는 문자들을 단순히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기표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 관객의 해석에 열려 있는 작품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킨다. 기호의 개방성은 의미의 다양성이자 불확정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문자 위에 복잡하게 얽힌 실들은 의미의 불투명성을 예시한다. 전시장의 한쪽공간에 설치된 영상에서 슬라이드 식으로 상영되는 작품은 [250인의 아이디어]와 연관되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통해 수집된 텍스트를 이미지로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답변에 대한 작가의 해석인데, 화산분출, 숲, 꽃, 혜성, 야경, 식물 단면, 스포츠, 건물, 내리치는 벼락, 새떼들, 표범, 코끼리, 불꽃놀이, 하마, 무지개, 광물 편광 사진, 꽃씨, 우주, 세포, 식물 단면 등 매우 다양하다. 수많은 출처를 가진 이미지 자료들은 직접 찍은 것도 있고,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것도, 구입한 것도 있다. 작가는 독자로 위치를 바꾸어 또 다른 해석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비디오 프로젝트인 [잠상(보이지 않는 현상에 대한 주시)]는 1시간 20분 분량으로, 바다 가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이다. 너무 느리게 변화하여 거의 스틸 이미지처럼 보인다. 작가 말대로 비디오라는 형식을 빈 평면작업에 가깝다. 바다 이미지는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변화하는데, 작가는 이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현상에 대한 주시를 의도했다고 한다. 밀고 밀리면서 무한한 차이와 반복을 실행하는 바다는 의미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에 대한 거대한 은유가 된다. 전체적으로 시각적인 유사성이나 연관성이 전혀 없는 듯한 전시장의 작품들은 해석의 연쇄 고리를 통해 끊어질 듯 이어진다. 작품들은 각자 자족성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나열 되었다기 보다는, 현재하는 그리고 기록에 남아있는 관객들과 작가의 복잡한 해석의 그물망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작가는 최초의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뿐, 그 과정과 내용을 채우는 것은 관객(독자)들이다.
권혁의 작품은 작가에 방점을 찍는 고전적인 의미의 ‘작품’이기보다는, 관객의 참여 과정과 텍스트로서의 작품은 의미나 진리의 원천으로 가정된 작가의 주체성보다는 상호 엮이며 만들어지는 생성, 즉 의미가 구축되는 과정이 중시된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해석의 고리를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고전 문양에 대한 해석은 정확한 사전적 정의나 단선적인 의미를 넘어서, 무한한 구조와 복수 언어를 향한다. 다양한 기원을 가지는 선행 언설들로 짜여 있는 텍스트는 유희적 과정을 거치며 역동성을 획득한다. 권혁이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전통문양은 본래의 원초적인 의미로 수렴되기 보다는 끝없는 사고를 야기한다. 문양을 에워싸는 겹겹의 층이 만들어내는 옵티컬 패턴은, 가려진 기원(흔적)과 무한한 확산을 예시하는 듯하다. 권혁의 작품은 ‘A는 무엇이다’라는 명확한 선적 서술이 아니라, 복잡한 표면의 그물망을 통하여 작품의 최종적 의미를 지연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의미의 무정부 상태가 아니라, 열린 의미를 향한다. 벽면에 설치된 단어들은 완벽한 문장이나 의미를 형성하지 않고 불연속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비워 놓기와 벌려 놓은 틈새를 통해 그 안을 또 다른 상상력으로 채울 것을 요구한다. 수집된 문장을 작가가 이미지로 다시 번역한 영상작품에서도 컷과 컷 사이는 심연이 존재한다. 작품의 원초적 시발점이 되었던 전통 문양들은 반투명 천들에 겹겹이 가리워진 채 수수께끼 같은 에너지를 발산한다. 권혁의 작품은 무엇인가로 가득 찬 의미의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남을 통해 더 많은 의미가 생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텍스트 이론을 주장한 롤랑 바르트는 자연스럽다는 것, 자명하다는 것, 유일하고 교조적인 의미, 이런 것들은 ‘나쁜 예술’임과 동시에 소부르주아 계급 문화를 정의하는 특징적인 것들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제국주의, 그것은 바로 ‘가득 찬’이다. 그 앞에 의미되지 않은 나머지가 있다.
반대로 ‘좋은 예술’은 가득 찬 의미의 유혹에 대해 투쟁하는 작품이다. 바르트는 울타리 없는 언어, 결정된 목표가 없는 언어가 여전히 자유롭고자 하는 주체를 위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권혁의 작품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힘든 여정이 발견되긴 하지만, 작품 자체는 가볍고 투명하다. 비닐, 실, 철사, 망사, 필름지 등 작가가 애용하는 재료들부터가 그렇다. 권혁의 작품은 새롭게 채워지기 위해 비워지며, 작가는 작업실에 은둔하기 보다는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 결과물은 파편적이고, 해체적이기 까지 하다. 그녀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인 작품은 실재 자체가 그렇듯이 불연속적이다. 이 불연속은 전시장을 직접 찾은 또 다른 관객에 의해 또다시 보충될 것이다. 수많은 요소들을 통일시키지 않은 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방식은 다소 대중 이벤트같이 보이기도 하는 권혁 작품에 내포된 현대 예술적 측면이다.
흩어진 채 계속 변화하는 그것은 예견치 못한 언어들을 산출한다. 권혁의 작품은 예술가 주체와 관객(독자) 사이에 새롭게 설정된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작품이 가지는 모든 의미의 기원을 주체에 할당하는 근대적 개인주의와 거리가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과거의 작가는 아버지가 자식을 기르듯이 자기의 작품을 기르는 관계에 있었다. 이와 반대로 현대의 작가는 텍스트와 동시적으로 태어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작품에 선행하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가 아니다. 새로운 작가는 더 이상 자기 속에 정열들, 기분들, 감정들, 인상들이 아니라,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서 그 속에서 작업을 한다. 말하자면 인생은 텍스트를 모방하는 것 이상은 아니며, 텍스트는 기호의 직조물이자 끝없이 이어지는 모방이라는 것이다. 텍스트는 신과 같은 작가의 전언인 하나의 신학적인 의미를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이지 않은 다양한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부딪히는 다면적인 공간이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 뒤에 있지 않으며, 그 자신에도 뒤가 없다. 바르트는 텍스트를 짜고 있는 코드들의 수효가 높을수록, 텍스트의 목소리들이 근원을 포착하기 어려울수록 많은 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텍스트의 주도권을 가지는 것은 작가가 아니다. 창조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작품의 의미나 특별한 비밀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이 주체가 되는 능동적 표현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신화를 거부함으로서, 타인과 세계, 그리고 작품에 대한 열린 태도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방대하다면 방대할 수 있는 ‘나누다’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권혁은 작품을 시작하고 마무리 짓는 매개자로서,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독특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매개 과정을 통해 상이한 기원을 가진 것들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결합된다.
작가에 대한 새로운 규정은 연속적으로 독자(청중, 관람자)의 위상을 변화시킨다. 현대의 텍스트 이론에 의하면 텍스트는 다양한 선행 언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다양함이 수렴되는 자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주장된 것처럼 작가가 아니라, 독자이다. 텍스트 뒤에 능동적인 사람도 없고, 청중 속에는 수동적인 사람도 없다. 고전적인 텍스트는 독자에게 수동적인 수용을 강요한다. 그러나 새로운 텍스트의 척도는 종결된 생산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이끄는 생산 작업 자체에 있다. 여기에서 이상적인 관객은 오독하는 자이다. 심지어 바르트는 작품이란 작가가 그것을 만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한에서만 오래 지속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독자에게 보다 능동적인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작품은 쉽게 읽혀지거나 보여지기 보다는 새로운 생산을 가능하도록 한다. 훌륭한 작품의 기준은 언어의 무한한 생산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자가 자신을 생산된 것이 아니라, 생산 속에 놓는 것이다. 그것은 삼키기 좋게 포장되어 수동적인 소비만을 강요하는 대중문화와 구별되는 예술의 본질적 특징이기도 하다.
출전 | 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 부문 지원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