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들에 비해 예술가가 유별나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자의식만큼은 남달라 보인다.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보통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기 마련인 상식과 합리, 관습과 관례를 의심하고, 그 의심을 자신의 존재론적 조건과 결부시킨다. 나는 이렇게 불분명한데, 내가 서있는 자리는 이토록 불투명한데, 세계는 어떻게 저렇게 투명하고 고요할 수가 있을까. 사실, 투명한 정적에 감싸인 세계란 한갓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세계는 동적이며 걷잡을 수가 없다. 이런 정적인 세계를 걷어내고 동적인 세계와 직면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며, 소외효과며, 소격효과다.

세계와 나는 결코 친해질 수가 없다. 세계에 나를 맞출 수가 없다. 이렇게 세계에 적응하느라 전전긍긍해 하는 소외(혹은 자기소외)를 화가들은 자화상으로 그렸다. 자화상이야말로 가장 존재론적인(혹은 실존적인) 그림이다(모든 자화상에는 세계를 의심하는 화가의 눈초리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어떤 화가들은 자화상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낱낱이 헤아리는 행위로 대체하기도 한다. 캔버스 가득히 끝도 없이 숫자를 써가는 로만 오팔카가 그렇고, 그날그날의 일기를 모아(그 중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일상이 빈 종이로 남겨지기도 한다) 거대한 아카이브를 축적해가는 한나 다보벤이 그렇다. 시간을 헤아리는 것만큼 정직하고 고지식한 행위가, 존재론적이고 자기반성적인 행위가 또 있을까. 시간은 사건이며, 삶은 순간순간이 예기치 못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다는 것이며, 흥분되는 것이 아니라 불투명하다는 말이다.
권소정의 작업은 이렇듯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헤아리고, 자신의 존재론적 조건을 반추하는 행위에 연유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볼 수가(인식할 수가) 있는가. 내가 나를 규정하는가. 아니다. 나는 너에게 보여 지고, 너에 의해 규정된다(재구성된다). 그렇다면 나를 규정하는 너는 누구인가. 제도다. 이렇게 권소정의 작업은 개별주체와 제도와의 관계로 확대 재생산된다. 나는 제도적 주체와 실존적 자아로 분리된다. 이 가운데 사회적 삶을 사는 것은 제도적 주체의 몫이다. 얼핏 나의 삶을 사는 것은 나 자신 같지만, 그러나 그 삶은 기실 실존적 자아를 소외시킨 반쪽짜리 삶일 따름이다. 나는 평일이면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간다(나는 건전한 사회인이다).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간다(나는 신심을 간직한 경건한 사람이다). 교회가 끝나고 나면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교외로 드라이브를 간다(나는 충실한 연인이며 가장이다). 이렇게 내 삶은 내가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도가 만들어 놓은 틀에 나를 맞추는 삶이다. 제도가 곧 삶이다. 일탈 역시 예외일 수가 없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마저도 언제든 재차 일상으로 되돌려질 수 있다는 보장 하에서의 감행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좀 과장되게 말해 제도가 곧 삶이라면, 삶이란 제도에 맞춰 사는 것이라면, 이러한 사실을 존재론적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대신, 오히려 나를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 제도에 개입하고 간섭해 제도를 조작하고 만들어갈 수는 없을까, 하는 문제의식, 자의식으로부터 권소정의 작업은 시작된다. 내 삶은 나의 것인 만큼 내가 계획하고 실천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이 사실은 그러나 사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연초에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지, 하고 계획을 짠다. 그러나 그 계획 그대로 실행에 옮겨지는 일은 거의 없다. 계획은 그저 관성에 지나지 않고, 그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탓하지도 않거니와 나 자신을 자책하지도 않는다. 제도가 예비해놓은 틀을 벗어날 수도 없거니와, 그 틀에 대한 능동적 도발이랄 수 있는 계획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권소정의 작업이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다. 내 삶은 나의 것인 만큼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실천하고, 내가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적어도 외관상 자명해 보이는 이 사실의 실행과정에서 제도에 개입하고 간섭해 제도를 조작하고 만들어간다는 기획이다(그렇다고 제도를 위반하는 것과 같은 무슨 반제도 내지는 탈제도의 거창한 실천논리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삶이라는 거대한 제도, 그 제도가 작동하는 메커니즘, 그 유기체적 생리 혹은 생태에 대한 심각한 자기반성의 강력한, 진진한, 흥미진진한 사례를 예시해준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의자를 전시한다. 1년 전 계획된 디자인하기와 만들기에 따라 일주일간 디자인한 의자들이 그 다음 일주일간 만들어졌고(아마도 모형?), 이번 전시에서 이 의자들을 실제 사이즈로 (재)제작해 선보이는 것이다. 의자는 말하자면 단순한 의자가 아니다. 1년 전에 그 구상은 미리 계획되었고, 그 계획에 따라 제작된 것이다. 여기서 아마도 의자 자체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의자가 진즉의 계획을 증언해주는 부산물이란 점이며, 이를 통해 작가가 진즉에 삶을 계획하고 실행한다는 것이며, 자신의 삶에 개입하고 간섭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자신이 개입하고 간섭한다? 일견 모순어법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말 속엔, 그러나 작가의 작업을 지배하는 핵심논리가 들어있다. 나의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나의 삶은 제도가 만들어놓은 틀에 나를 맞추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틀에 개입하고 간섭하고 조정한다는 것은 스스로 제도적 주체가 돼보는 것이며(질 들뢰즈의 논법으로는 제도적 주체되기),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질 들뢰즈의 논법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능동적으로 사용하기). 수동태로부터 능동태로의 삶의 전환을 감행하는 것이다.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하고(제도의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상식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혁명에 대한 실천논리로도 보이는 이 계획은 사실, 10년 후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묻는 우연한 인터뷰가 그 계기가 되었다. 10년 후 자신을 누가 알까? 10년 후 제도가 예비해 놓은 삶을 누가 알까? 제도가 삶을 예비하는 것이라면, 이와는 거꾸로 내가 삶을 예비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한 해 계획 세우기>(Planning a year)며, 이번 전시는 이 프로젝트의 한 부분이다.

2008년부터 2010의 2년간에 걸친 현재진행형 프로젝트인 이 기획은 크게 계획하기와 실행하기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지난 2008년 3월 1일부터 2009년 2월 28일까지 계획하기가 시행되었으며, 2009년 3월 1일부터 2010년 2월 28일까지 실행하기가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꼭 일년 후 매일같이 실행에 옮길 계획을 미리 가정해본 것(혹은 전제해본 것)이다. 계획하기 단계에서 작가는 자신의 인터넷 주소에서 무작위로 선택한 365명의 익명의 주체들(일년간에 해당하는 숫자와 일치하는)을 일종의 프로젝트 증인으로서 가정하고 그들에게 일일이 계획한 사실을 이메일 주소로 전송한다. 그리고 2009년 들어서의 실행단계와 과정 그대로 아카이브와 도쿠멘타 형태로 기록하거나 재구성해 이 프로젝트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웹사이트에 낱낱이 게재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전시장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실행과정에서 수집된 아카이브와 함께 그렇게 계획된 행위나 이벤트를 실현(실연)해 보여준다.

실행계획의 예를 보면 고양이 옆에서 생선을 굽는다거나, 웅크린 고양이의 그림자를 밟는다거나, 저녁 먹었어? 라는 질문을 누군가에게서 듣는다거나, 차 안에서 친구와 함께 글렌구드를 듣는다거나, 불편한 자세로 책을 읽는다거나, 양말을 깁는다거나, 이불빨래를 한다거나, 존이라는 사람을 만난다거나, 새벽 4시에 라디오를 들으며 공항으로 간다거나 하는 등의 굳이 하려들면 할 수도 있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경찰에 잡힌다거나, 총을 쏘는 등의 과연 실행 가능할까 싶은 계획들도 있다. 계획의 종류에 따라서, 그리고 작가가 맞닥트리게 될 실제 상황 여하에 따라서 계획을 실행하는데 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반나절이 소요될 수도 있고, 하루가 꼬박 투사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하고(고양이 옆에서 생선 굽기), 힘들 것 같기도 하고(불편한 자세로 책 읽기), 때론 위험하거나 불가능할 것 같은(총 쏘기), 이런 일들을 할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스스로 제도적 주체가 돼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제도의 존재와 방식을 드러내고 주지시키는 것이며,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의 페르소나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제도란 익명적 주체들을 이어주는 관계며, 주체와 타자를 연결시켜주는 네트워크며, 이를 통해 소통의 계기를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망이다. 페르소나란 결국 이런 익명적 주체들, 타자들과의 관계의 망으로부터 생성되고 잉태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한 해 계획 세우기>(2008-2010), 비닐봉지에 저마다의 입김(생기)을 불어넣어 부풀린 것을 줄에 매달고 다니면서 그 봉지와 말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시키기도 하는, 현대인의 외로움에 유머로 반응한 <애완가방 프로젝트>(2006),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공을 굴리는 사람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를 위해 예비해놓은 웹 사이트에 접속하도록 유도한 <공 굴리기 프로젝트>(2008) 등 권소정의 일련의 프로젝트들은 종래에는 이런 익명적 주체들과의, 주체와 타자와의 소통의 계기를 트는 관계의 미학을 예시해준다.

이 일련의 프로젝트가 제도적 장치(이를테면 작가와 관객과의 네트워크와 미술관과 같은)가 생성되고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엿보게 한다(특히 공중에 띄운 초소형 미술관을 통해 전시관행을 문제시한 2008년 작품 하늘을 나는 미술관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제도적 장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적 예술로(조지 디키의 예술제도론과 연동된), 익명적 주체들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관계 혹은 소통 예술로(커뮤니케이션학과 연동된), 그리고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삶의 계기들에 연유한 상황논리가 주요 동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상황주의 예술로(기 드보르의 실천미학에 연동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