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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의 관계에 대한 단상

이선영


전통과 현대의 관계에 대한 단상


미술계 현장에서 평론활동을 하다보면 특정 장르의 포트폴리오나 전시 자료를 몰아서 보게 되는 경험이 종종 있다. 동양화과에 다니거나 그 과의 출신들의 작가 노트나 작품의도 등을 읽다보면 늘 등장하는 단어가 있으니, 그것은 ‘전통과 현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그들은 거의 강박관념처럼 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하기야 계몽주의 이후, 전통의 무게를 떨궈 내려 노력한 서구의 근대 역시 ‘새로움의 전통’으로 표현되는 바와 같이, 전통이란 순수한 현재만을 분리하기 힘든 문화적 상황에 얽혀 있는 문제이다. 서양화에서 쓰는 붓이나 캔버스보다 민감한 도구를 사용하는 동양화는 동양미학이라는 첩첩의 장막에 둘러싸인 신비의 영역에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전통이라는 것이 표류하는 현대 속에서 ‘오래된 미래’같은 훌륭한 가치가 될 수 있을까. 필자 또한 그것이 궁금하여 유독 집요하게 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양화과 출신들의 작품을 눈여겨본다. 그러나 개념이나 작품을 통해서 이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발견하는 경우는 흔치않다. 한편 질문을 던지는 자에게만 답변에 근사한 그 무엇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필자 또한 그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려고 애쓴다. 16명의 학생 또는 예비 작가의 전시를 지켜보면서, 그들 또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 학교의 문턱을 나서기 전인 16명의 예비 작가의 작품들에는 그 동안 갈고닦은 한국화 기법에서 녹아있을 전통의 요소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작업을 하고 살아갈 자신과 그 주변에 대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있다. 전통과 현대의 문제란, 결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담론 중의 거대담론 인듯해도, 결국은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어쩌면 그 실마리는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전시의 작품들의 미덕은 정체성이나 일상 등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만약 ‘전통은 무엇이다’라고 규정하기 힘들다면, 무엇이 전통이 아닌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도 편리할 것이다. 전통이라는 것이 살아있는 화석 같은 것, 가령 이전에 실재했던 것으로 가정된 이상적 원형을 그대로 복사할 수 있는 인간문화재 같은 것일까. 그것은 원형/복제의 이원론에 입각한 재현의 논리에 속하며, 재현은 플라톤의 철학이나 기독교적 전통이 강한 전형적인 서구의 논리이다. 그러나 이항대립에 근거하는 재현의 논리는 시뮬라크르의 장으로 변화하고 있는 현대의 추세와 동떨어진 것이 되었다. 전통을 현대화한다고 하면서, 전통도 현대도 아닌 임의적인 혼합물의 범람 또한 심란하다. 종합이 이루어지기 위한 선결 조건은 양자의 차이와 경계선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도저도 아닌 무분별 속에서 이전의 두 항을 지양할 새로운 것, 적어도 차이가 있는 것을 만들어 내기란 힘들다. 얼마 전에 유행했으며 벌써 낡은 것이 되어버린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 우는 사조가 그러했다. 그것은 새로움과 진보라는 근대성의 끝자락에서 일어난 반동과 자기모순이 뒤범벅이 된 해프닝이었다. 현실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전통은 세계 시장화로 귀결된 보편적 질서 속에서 상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국가가 급하게 다시 찾아내야하는 벼락부자의 족보 같은 것일까. 앞만 보고 달려왔던 우리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팽겨쳐왔던 것이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량공세와 속도전으로 아무리 거대하게 그리고 빠르게 복구하려 해도 쉽지는 않다. 그래서 전통은 적당한 선에서 세계에 내놓을만한 이국적 문화상품으로 코드화 된다. 이 단계에서 전통은 장식으로 전락한다. 특히 위정자들은 자신의 허술한 정통성을 가리기 위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기력 화 된 전통이라는 알리바이로 필요로 하며, 이들에 의해 전통은 급조와 폐기가 반복된다. 전통은 어딘가에 잘 모셔져 있는 것, 우리가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어떤 실체, 본질, 순수의 결정체 같은 것이 아니다. 전통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조차도 변화한다. 전통은 어딘가 신성한 말씀으로 적혀 있는 것도 아니다. 전통과 상보성을 이루고 있는 현대성의 개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전통이란 그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후에도 그럴 것이듯, 창조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것이 아니라, 미지의 것이다. 창조라는 말이 신학을 비롯한 이전 시대의 형이상학을 떠오르게 한다면, 구성이라고 해두자. 구성은 끊임없는 선택과 해체의 과정 중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명확한 중심이 아니라, 조금씩 탈 중심화 되면서 차이와 반복을 행하며, 영원히 회귀한다. 영겁회귀란, 겉보기의 진보 이면에 억압과 배제, 그리고 파괴를 낳은 서구의 단선적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 니이체--그는 가장 현대적인 철학자에 의해 미래의 철학자로 추앙받았다--가 대안으로 내세웠던 고대의 혹은 동양의 논리이다. 이 영겁회귀의 과정 중에서 필연적인 것만이 회귀한다. 이러한 회귀를 위해 내세운 이 전시의 논리가 전통에 쉽게 가정되곤 하는 유기적 전체가 아니라, 파편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것은 큰 덩어리가 전제하는 굼뜸, 정체, 경직된 체계를 벗어나려 한다. 단편들은 연결을 욕망한다. 그것도 끝없는 연결을. 이 단편들은 잃어버렸거나 복구되어야 할 전체의 일부가 아니다. 이 단편은 어떠한 선험적 총체성에의 가정이나 희망도 배제한 채 타자와의 직접적인 유대, 이질적인 것과의 접목, 순발력 있는 연결망을 원한다. 이 연결망에 실핏줄 같은 살아있는 흐름을 통과시키는 일은 빈사 상태의 전통과 외양만 그럴싸한 현대성에 동시에 활기를 줄 것이다.





‘비평과 담론을 위한 네 개의 파편들’ 중 하나의 파편(16명 중 5명의 작품에 대한 글)


김애정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를 향해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노란 선들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가는 듯한 여자 아이, 또는 인형은 젊은이 특유의 부유하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애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짤뚱한 몸의 인물들은 모두 아이의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아이는 어른의 시각에서 코드화 되곤 하는 귀엽고 순진무구한 천사의 모습은 아니다. 많은 그림들에서 정확한 표정을 읽을 수 있는 머리통이 모두 날라 가 있는 상태이다. 무청같이 푸릇한 손발을 가진 아이의 머리는 무 자르듯이 싹둑 잘려져 있고, 팔과 발이 없는 알록달록한 아이는 온 몸이 박피가 된 듯 피부에 병적 징후를 각인한다. 기어가는 아이의 머리가 저 너머의 공간으로 터져 나가는 작품은 한 개체 내에서 일어나는 폭발적인 파국을 공간으로 아스라이 퍼져 사라지는 폭죽처럼, 깃털처럼 가벼운 것으로 변화시킨다. 덕지덕지 기워진 아이 머리를 표현한 움직이는 입체작품에서 눈은 푸른 빛 광선을 뿜어내며 폭발한다.

김애정의 작품에는 사소한 충격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반응하는 민감한 세대의 감수성이 드러나 있다. 그녀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에 연루된 인간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캐릭터로 표현한다고 말한다. 아이로 설정된 인물은 자신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다양한 상황에 놓여 지면서 당면한 강렬한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인체 기관인 얼굴을 대신하는 것은 몸이다. 얼굴이 있는 작품에서도 눈을 표현하는 특이한 방식은 인물의 맹목적 상태를 예시한다. 그들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 있다. 얼굴이나 눈 대신에 온몸으로 전이된 감정은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아이라는 캐릭터는 단지 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어른들이 설정해 놓은 금기를 자유롭게 위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김애정의 작품 속 아이가 단지 어른의 세계 속에서 일방적으로 보호받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들도 어른 못지않게 상처받으며 달갑지 않은 세상의 질서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심지어는 개체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의 파국적 상황에 곧잘 놓인다는 것을 그녀의 자극적인 도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품 속 캐릭터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로서의 인간, 그 대표적인 부류인 작가에 대한 또 다른 상이다. 작품 속 캐릭터는 아이와 인간, 작가라는 세 가지 범주를 종합한다. 이러한 인물은 축제 속에서 갖가지 금기를 위반하는 어릿광대 왕이나 트릭스터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작품 속 상황들이 모두 축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축제란 그 자체가 과도기인 혼란의 시공간을 상징한다. 이러한 시공간 속에서 체계와 질서가 자리 잡기 위한 창조적인 실험이자 개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과오들이 사건화 된다. 과도적 존재는 금기가 위반되는 축제 이면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차가운 일상, 이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다. 작품 속 인물은 자신을 완전히 해체할 것 같은 유쾌한 혼란과 고착된 지상 한 켠으로 환원시키려는 질서 사이에서 방황한다.

김정은

김정은의 작품은 낱장으로 부담 없이 그려진 낙서화 같은 형식을 가진다. 그것은 커다란 캔버스에 단단히 밑칠을 하고, 작가가 머릿속에 고안한 형식과 내용을 스펙터클하게 펼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낙서 같은 방식은 단지 형식의 차이가 아니라, 태도의 차이가 내포되어 있다. 작가로서의 야심보다는 구체적 삶을 살아가는 개체로서 느끼고 격은 것들을 혼자만 보는 일기처럼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은 독백에 가까운 고독한 것이지만, 죽 펼쳐지면서 같은 문제를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감을 촉구하는 대화적인 방식이다. 대화는 매우 소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두서없는 낙서들이 그렇듯이 여기에는 개인의 무의식이 직접 투사된다. 의식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은 무의식은 야생적이고 때로 공격적이다. 작품 속 그들은 타자에게 가학적이고, 스스로에게 피학적이다. 낙서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는데, 인물들은 모두 거칠고 스산한 모습이다.

장 내부가 그대로 보이는 인물들은 원초적인 생물학적 욕구를 드러낸다. 사회적 요구나 상징적 욕망 이전에 충족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욕구의 필요성은 결핍된 존재의 상황을 그린다. 그것은 단지 개체가 스스로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영양을 섭취하는 단계라기보다는 그것에 준하는 필연적 상황을 나타낸다. 장 내부가 X-레이 사진처럼 투사된 작품들은 모두 [위안], 또는 [위로]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그러나 뭔가를 잔뜩 입에 쑤셔 넣고 있는 모습이나 섭취된 내용물로 묵직해진 장기들을 그린, 섭식과 관련된 이미지에 붙여진 제목들은 포만감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상황, 또는 급하게 먹었던 그것이 과연 몸에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야기한다. 그것은 주변의 온도와 무관하게 잔뜩 끼어 입은 사람, 자신에게 맞지 않는 불편한 옷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과 중첩된다. [껴입은 사람]이나 [인형 옷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그러하다.

하나의 개체가 환경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투입과 배출의 원활한 피드백은 유기체적으로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 거친 선묘들에 의해 번번이 차단된다. 거친 낙서화가 표현하는 박탈감은 핏물을 뒤집어 쓴 듯 한 작품 [감정차단]에서 극대화 된다. 난데없이 개체를 덮치는 비우호적인 환경 속에서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숨는 것이다. 작품 [인형 옷 입은 사람]은 뭉크의 작품 [외침]처럼, 잔뜩 공포에 질린 채 벽 귀퉁이에 쭈그려 앉은 마스크 맨을 보여준다. 김정은은 낙서판을 퍼즐처럼 이어나가면서 탈주를 시도한다. 명확한 진행이나 확장의 원칙이 없이 그때그때 되는대로 이동하면서 잡히는 것을 거부 한다. 중간에 연작의 형식을 취하는 시리즈도 포함되어 있지만, 수 십 장의 낙서화와 채색화가 조각 잇기 된 작품들은 선적인 내러티브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낙서화의 방식 자체가 완성보다는 과정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이며, 결말보다는 발상 단계의 활기를 보존하는데 치중한다.




이소정

이소정은 그림의 면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들여다본다. 먹의 농담으로만 나오는 색으로 그려진 사람의 옆모습은, 마찬가지로 피부의 자연색이 살아있는 황갈색 옆모습과 짝을 이룬다. 두 개의 화면으로 쪼개져 있고 약간 어긋나 있는 구도로 두 눈은 마주치지는 않지만 심리적인 연결선을 가진다. 그것은 실재와 그림자와 같은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거울상처럼 실재를 비추는 희미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통상적인 화면의 비율을 넘어서 좌우로 길쭉하게 늘여진 작품 역시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림 바깥을 흘낏 보는 두 인물을 마주해 놓았다. 한 화면 속에서, 또는 두 화면을 마주하고 시선을 교차시키는 이소정의 작품 [마주보기]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연스럽지만 잔인하기도 한 의식을 행한다. 쌍둥이처럼 마주한 분신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반드시 애틋하고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거울을 보며 느끼는 나르시시즘은 쉽게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심리학은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 공격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반작용일 것이다. 육안으로서는 부분으로나 관찰할 수 있을 뿐인 조각난 신체들을 거울을 통해 통합된다. 통합의 과정에서 사회가, 그리고 스스로가 요구하는 자아의 상이 확립된다. 분열된 몸을 잇는 매개는 바로 상상이다. 이소정의 작품에서 상상의 영역은 뒤로 흘려놓은 뒤통수의 광대한 영역을 통해 강조된다. 단색으로 가득 채워진 이 영역은 어떠한 균열도 이음매도 없는 광대무변한 표면을 형성한다. 물리적으로는 얼마 안 되는 크기일지 모르지만, 인체에서 얼굴이 가지는 중요성과 해부학을 완전히 무시하고 펼쳐놓은 또 다른 영토의 상대적인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필요라는 협소한 목적을 위해 인간을 도구화 시켜 기능별로 분해된 부분이 아니라, 그자체로 자족적인 우주를 형성한다. 이소정은 이렇게 넓혀놓은 공간을 새로운 무엇인가를 담기 위해 텅 비워놓는다.

그녀 스스로를 빼어 닮은 해부학적인 얼굴의 구조들과 연결된 이 공간은 거울의 면과 그림의 면에 동시에 채워질 공통 영역이다. 초상의 옆모습에는 귀가 없는데, 이는 선택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눈과 달리,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옴으로서 개체를 교란시키는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기 위한 보호 장치이다. 원래 그림이란 말이 없는 것이지만, 이소정의 작품은 더욱 적막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에 몇 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다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돌아온 예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자신에게 요구되었던 사회적 역할들에 대한 생각을 스스로 마주한 거울상 같은 이미지를 통해서 펼친다. 자신만만하게 대상을 주시하는 모습이 아니라 멈칫거리는 눈길, 무엇인가를 강하게 표현하고 말하기 보다는 다소간 무표정한 얼굴은 여러 가지 감정의 상태가 응축되어 있다. 이소정의 독특한 자화상에는 더 이상 사회적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얼굴을 다시 만들어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박설아

박설아의 작품은 건축적 구조들과 그 구조의 바탕을 이루는 추상적인 색들로 가득하다. 모노톤의 색조는 구체적인 장소성을 삭제하고 추상적인 공간감을 강조한다. 진하게 칠해진 밀도 있는 색채는 한 장소, 또는 여러 장소들에서 느꼈을 감흥들을 녹여낸다. 그 위에 반듯반듯한 선적 요소들이 구성상의 묘를 발휘하며 배치된다. 어디엔가 실재하며 그녀의 눈에 들어온 인공적 구조들에서 많이 보이는 요소는 계단이나 문이다. 계단이나 문은 분리되면서 연결되는 구조를 가진다. 계단은 여기와 저기를 잇고, 문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통과하게 하는 장소이다. 이러한 구조는 통과의례처럼 거처 가야만 하는 인생의 여러 단계들을 상징한다. 그러나 현대는 전통사회와 달리, 통과해야할 의례가 무제한으로 연장되어 있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갖추어야 할 ‘스펙’은 과거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서 있다. 박설아의 작품은 이 계단이 끝나면 또 다른 계단이, 이 문을 통과하면 또 다른 문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끝없는 기대와 좌절을 낳을 것이다.

최종 목적지나 출발지 보다는 이행의 과정에 방점이 찍힌 이 구조들은, 마찬가지로 모호한 공간감을 가지는 건축적 요소와 뒤섞여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계단은 단단한 기저 면에 정착되지 않는다. 끝자락을 나풀거리는 계단은 하나하나 밟아가면서 단계 별로 올라갈 수 있기보다는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 추락할 것 같은 위기감을 준다. 자잘한 일상의 장면들을 삼켜버리는 단색조의 배경은 심연의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농밀한 색은 명료하게 규정될 수 없는 것들을 상징한다. 이름 붙여 질 수 있는 색은 색이 아닌 까닭이다. 자바라 게이트처럼 단단한 철재 구조물 역시, 천처럼 얇게 접힌 계단처럼 불안정한 이행의 단계를 보여주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늘이자 바다인지 모호한 공간 속에서 서로 떨어진 장소를 잇는 구조물은 허공에 붕 떠 있으며, 원래는 명확했을 자신의 기능을 저버리고 수수께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 대상은 특별한 왜곡이나 변형의 과정 없이 맥락만을 달리 함으로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여 진다. 박설아의 작품에서 이곳과 저곳을 잇는 계단이나 자바라 게이트 같은 특정 구조물의 공통점은 그것이 접혔다 펼쳐졌다하는 가변성을 가진다는데 있다. 공간의 신축성은 마찬가지로 시간의 신축성을 불러온다. 그녀의 작품에서 시간과 공간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여러 겹으로 주름 잡힌 공간과 시간을 보여준다. 단색조와 간결하게 그어진 선들은 건축적인 요소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표면을 강조한다. 깊이가 아닌 표면이 무한히 반복하고 회귀하는 미로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곳에서의 방황은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다. 이것이 모호함에서 시작되어서 모호함으로 끝나는 악무한의 회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분리된 영역 간의 상징적 차이가 분명하게 설정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정합적인 공간을 연출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영역들 간의 질적 차이가 좀 더 부각되어 함을 의미한다.

한은혜

한은혜의 작품은 일상의 소소한 구석들에 시선이 고정된다. 금이 간 담벼락, 보고 즐기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화분들, 추레하게 늘어진 발, 수채 구멍이 뚫려 있는 바닥, 편지 한통도 안 들어 있을 것 같은 우체통 등이 그것이다. 그녀는 ‘작지만 그 안에 진가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번쩍거리는 새 것 만이 욕망되는 현대에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한다. 화분이나 우체통 같이 관객을 마주하고 서있는 구조물은 인간을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비유법 속에 잠재된 인간은 특별한 존재감이 없이 밋밋하다. 그것들은 마찬가지로 올라가기 힘든 높은 계단과 한 낮에도 어두침침한 골목, 날씨와 소음에 취약한 크고 작은 문과 창문들이 있는 허름한 동네에 구석구석 박혀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초라함은 초라함으로 소소함은 소소함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지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구상성이 유지되는 경우에 한해, 서양화에 비해 극적인 효과를 내기 힘든 매체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빛과 어둠의 대조는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한은혜의 작품에 서사를 만들고 추동하는 원천이 된다.

극적인 대조로부터 야기되는 낙차가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가파른 계단이 있는 동네 한 켠은 가로등이 켜 있어 지상에 드리워있는 어둠을 강조한다. 물살이 센 샤워기처럼 철철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도 지상의 깊은 어둠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다. 화면은 빛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전히 칙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에 비관적인 정조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줄지어 서있는 작은 화분들은 창에서 쏟아지는 빛줄기에 의해 아기자기한 실루엣을 드러내며,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빛은 초라해 보이기만 하는 그곳을 아늑하게 변모시킨다. 어두운 집안을 밝히려 공간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환한 빛, 그리고 낡은 문짝을 열고 들어오는 하늘과 구름은 지상과 천 상 간에 경계를 소멸시킨다. 하늘이나 구름, 빛 등 천상적 요소는 인위적 구조물들과 달리, 구획되지 않으며 아무리 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낡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이 천상적인 것에만 고정될 때 작품은 초월적이 되고 관념적인 것으로 경도 된다.

반대로 지상적인 것에만 고정될 때 작품은 일상의 건조한 동어반복에 머무르고 만다. 그자체가 이미 물신화된 장면을 그대로 베껴내는 이미지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성스러운 말씀을 자자구구대로 도해하는 상황은 더욱 난감하다. 중요한 것은 양자 간의 교차인데, 그것이 한은혜의 작품이 시도하는 부분이다. 지상의 어둠에 대한 통찰은 세속을 초월하는 또 다른 차원을 통해 이루어진다. 낮은 곳에 임하는 지고한 가치, 세속에 깃들인 성스러움이 빛과 어둠이라는 대조법을 활용하는 한은혜의 작품에서 읽혀지는 내용이다. 다만, 매순간 갱신되며 번쩍거리는 인터페이스들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거칠어진 눈으로 보기에, 그녀가 구사하는 형식적, 그리고 내용적 대조법이 다소 약한 것은 사실이다. 섞임과 융화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지 동양화라는 매체의 한계인가, 아니면 이미 성(聖)과 속(俗)이 화해가 된 상태로 결론을 내버렸기 때문인지의 의문이 남는다.


출전 | ‘네 개의 파편들’전을 위한 워크샵 (성신여대 동양화과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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