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원/ 그림자의 그림자, 존재의 그림자고충환(미술평론가)
주지하다시피 김영원은 한국현대조각의, 특히 인체를 소재로 한 구상조각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이다. 특이한 것은 그가 속해져 있는 세대의 경향으로 치자면 소재의 물성에 천착한 추상조각이 대세를 이루고 있음에도, 유독 그는 진작부터 구상조각 혹은 형상조각에 뜻을 두고 이를 심화하고 변주시켜왔다는 점에서 특이성과 함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이처럼 추상조각으로부터 비켜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그리고 이후의) 인체를 소재로 한 구상조각의 일반적인 경향성과도 일정한 거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흔히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아카데미즘 풍 조각과의 차별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주의 조각으로도 선뜻 범주화가 주저되는 작가의 조각은 한마디로 세대로 보나 시대적 경향으로 보나 그 유사한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성향을 예시해주고 있다.
더불어 주목되는 점으로 그는 일관되게 인체라는 특정 소재에 천착해왔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인체는 마찬가지로 인체를 소재로 한 아카데미 조각에서 보듯 미적 향수를 위한 대상만도 아니었고, 현실주의 조각에서 보듯 현실을 반영하는 시대적 표상만도 아니었다. 그 경향의 경계 위에서 어느 정도 양쪽 경향 모두를 아우르는 작가의 조각은 굳이 따지자면 아카데미 조각보다는 현실주의 조각 쪽에 좀 더 비중이 실리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관심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고 재현하는 쪽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심층적이고 더 본질적인 인성과 인격의 본성을 밝히는데 맞춰져 있었던 것 같다. 작가 개인적으로 불교에 심취한 것이나, 특히 선사상과 선 수행에 정진한 것, 그리고 조각으로 하여금 그 사상과 수행의 표상이 되도록 의도한 것, 말하자면 조각과 선 수행을 상호관계의 개념으로 본 것은 작가가 인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그의 인체조각은 어느 정도 미적 향수의 대상이면서 시대적 표상일지도 모른다. 추상조각이 아닌, 인체를 소재로 한 구상조각에서 이 범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러면서도 단순한 미적 향수와 시대적 표상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탐색하는 존재의 그릇이며 실존의 표상이 아닐까 싶다.
이런 주제의식을 견지하면서 그의 조각이 변화해온 과정을 보면, 대략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의 <중력과 무중력> 시리즈, 1990년대 초의 <공- 에너지> 시리즈, 1990년대 후반의 <파장> 시리즈, 그리고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로 일별해 볼 수가 있겠다.
1970년대 후반 - 80년대 중반, <중력과 무중력> 시리즈중력 무중력 개념을 테마로 한 일련의 작업들은 대략 허공중에 헛몸짓을 하는 사람들, 사각의 틀에 갇힌 초상, 그리고 표면에 난 구멍으로 겉과 속이 서로 통하는 소위 통구조로 된 인체로 진화하면서 전개된다.
중력 무중력 개념은 무엇보다도 역학 개념이다. 즉 나와 외계가 만나지는 물리적 현상을 통해 나와 외계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인 만큼, 처음에 이 역학은 물리적인 현상을 의미했다. 이를테면 철봉대를 맞잡은 손에 철봉대만큼의 빈 홈이 생겨나며, 이로써 흡사 무언가에 매달려 있는 몸이 헛몸짓으로 허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서 나와 외계와의 관계는 물리적인 현상이 내 몸에 남겨준 흔적과 그 흔적이 환기시키는 기억으로 현상한다.
그리고 그 역학은 점차 물리적인 차원으로부터 인식론적인 차원으로 진화하는데, 이는 특히 그 표면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겉과 속이 서로 통하는 일련의 인체조각들에서 그 뚜렷한 실체를 얻는다. 겉과 속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음과 없음과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이 작업들은 이후 인체조각을 매개로 한 작가의 사유가 그림자의 그림자로 나타난 보다 심화된 시리즈 작업으로 진화할 수 있게끔 이끌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졌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림자의 그림자는 말할 것도 없이 실재와 이미지, 실재와 표상과의 관계를 암시하며, 더욱이 그 애매하고 모호한 경계를 인식시켜주는 개념이 아닌가. 말하자면 나, 자아, 주체, 에고를 손에 쥐게 해주는 결정적인 어떤 실체가 있는가, 혹은 나는 그 무엇인가로 꽉 차 있는 총체인가 아니면 텅 빈 공이고 허인가, 라는 물음과 관련한 자의식이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그 자의식은 사실상 이 인체조각들에서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중력과 무중력 시리즈는 역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 자체를 일종의 시대적인 메타포 즉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여타의 작업들에 비해 보다 직접적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한 경우로는 엉덩이에 꼭 낀 채 그 입에 야구공을 물고 있는 사람의 초상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잠재적으로 혁명의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는 사회적 리비도를 성적 리비도(섹스공화국)와 놀이 리비도(스포츠공화국)로 전이시켜놓고 있는 정치적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각의 틀에 갇힌 초상의 경우에서 사각형 틀은 말할 것도 없이 개별주체를 틀화하려는 제도의 기획과 관성을 암시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말하자면 중력을 개별주체를 억압하는 제도의 관성으로 보고, 또한 무중력을 이에 맞서는 개별주체의 일탈성의 계기로 본 것이다(예술이야말로 이런 일탈성의 계기가 극대화되는 장일 것이다). 혹은 중력으로 나타난 현실원칙에 역행하는 시대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무중력으로 상징되고, 그 무중력을 부유하는 무기력한 개인들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중력과 무중력> 시리즈는 1980년대 민중미술의 등장과 그 시기를 같이한다. 작가의 조각이 현실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이 시리즈 작업이 암시하는 정황들은 분명 작가의 현실에 대한 실천적 참여의식을 떠올리게 하고,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이뤄져야 하리라고 본다. 여하한 경우에도 인간실존에 대한 관심이 시대적 요청과 동떨어질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공- 에너지> 시리즈/ 1990년대 후반, <파장> 시리즈작가는 조각을 선 수행과정의 한 부분으로 본다. 조각과 선 수행이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고 본다. 조각과 선 수행과정이 상호관계적이고, 상호내포적이라고 본다. 이런 상호관계의 인식이 <공- 에너지>로 명명된 일련의 기둥작업으로 나타난다. 점토를 소지로 한 거대한 원기둥이나 사각기둥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 표면에 기공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전사시켜나간다. 그 행위와 과정은 무슨 퍼포먼스를 보는 것 같고 한바탕 춤사위를 보는 것 같다. 그 과정을 보면 먼저 자기내면에 흐르는 기를 읽고, 그 흐름에 자기를 순응시키고 일체화시킨다. 그렇게 몸 자체가 기의 흐름이 되고, 그 흐름의 자락들이 춤사위로 전이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기둥에는 기의 흐름이 만들어낸 흔적들이 아로새겨진다. 흔적으로 인해 비워지고, 흔적으로 해서 채워진다. 그래서 비움과 채움이 하나가 되고, 텅 빈 충만(공 자체가 에너지)으로 나타난 공의 의미가 실현된다.
그리고 <파장> 시리즈는 한눈에도 불교적 도상성이 강하게 어필된다. 참선 자세며, 수행 자세며, 경배 자세에서 어떤 전형성이 발견된다. 도상은 파격보다는 전형을 요구하는 성질이 있다. 그것이 일종의 기호로서 읽혀져야 하고, 기호로서의 의미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장이라는 제목처럼 한 형상이 반복되면서 퍼져나간다. 한 수행자의 수행이 타자의 존재에 미치고, 한 선사의 참선이 세계의 경계에 가 닿는다. 나는 나의 수행과 참선이 너에게 미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결코 수행과 참선을 멈출 수가 없다(라고 선승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네가 아닌 나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곧 너기 때문이다. 그 밑바닥에는 세상을 향한 무한자비가 놓여 있다). 나비효과? 그렇게 수행과 참선은 무한 복제되면서 나를 감싸고 너를 보듬고 세계를 아우른다.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생명 에너지로 충만한, 화해와 대긍정의 세계를 추구하게 되고, 그 추구가 탑재된 제3의 예술(미적 향수의 대상만도 아닌, 현실의 반영이며 시대적 표상만도 아닌 제3의 어떤 지점? 인간의 실존? 본성?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 상호영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부터 똑같은 형상을 반복적으로 열거하는 식의 방식이 이후 자기표현을 위한 한 문법으로 자리한다는 점이다. 혹 이 열거가 <그림자의 그림자>를 위한 착상을 떠올리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옛 이야기 중에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그림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영혼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악마가 그림자를 가지고 그와 삶을 흥정하는 장면에서 극명해진다. 좀 더 현대적인 예로는, 모델이 손에 들고 있는 향수를 그의 그림자가 탈취하는 장면을 재현한 유명향수회사 광고를 들 수 있다. 여기서 자아는 의식적 자기와 무의식적 자기로 분리되고, 그 향수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의식적 자기와 무의식적 자기가 서로 다투고 대립할 만큼 향수의 뛰어난 향기를 광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나 이미지는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림자와 관련한 상당한 의미를 시사해준다. 즉 예로부터 그림자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 이상의 영혼, 정신, 호흡, 숨결, 아니마 등 비가시적 실체의 메타포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또 다른 자기 즉 무의식적 자기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졌으며, 그 무의식적 자기는 곧잘 의식적 자기와 대립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실재와 그림자, 실재와 표상, 실재와 허상간의 경계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뚜렷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의 인식은 후기 근대적 자의식과 통한다. 이를테면 자기분열현상은 정신분석학의 핵심논리이며, 또한 실재와 표상간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인식은 후기구조주의의 소위 탈경계의 논리와 일맥상통한 것이다.
김영원은 <그림자의 그림자>로 명명된 일련의 시리즈 작업에서 인체를 절편처럼 나누어 안쪽 면을 편평하게 하고, 바깥쪽 면을 형상으로 처리한다. 이때의 형상은 흡사 동전에 새겨진 초상처럼 최소한의 윤곽과 실루엣만으로 이루어진 저부조 형식으로서, 실재감과 비실재감을 동시에 실현하고 있는 독특한 형상을 제안하고 있다. 아마도 그림자의 그림자가 암시하는 비실재감의 사유와 이에 따른 관념적인 성질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의도적인 형상일 것이다. 여하튼 작가는 이렇게 그 실체감이 희박한 인체의 절편(단면)을 서로 마주보게 하거나, 같은 곳을 향하게 하거나, 한 몸 안에서 서로 엇갈리게 재배치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해낸다. 여기서 절편과 절편은 원래 한 몸에서 분리되어져 나온 것이란 점에서 주체와 그 주체로부터 분리되어져 나온 그림자, 분신, 아바타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효과적으로 암시해준다. 그러면서도 단면과 단면이 배열되고 배치되는 양상 여하에 따라서 어떤 것이 주체이고 또한 그림자인지, 어떤 것이 모본이고 또한 사본인지,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든다.
그런가하면 단면과 단면이 서로 마주보게 세운 경우, 주체와 그림자(또 다른 주체?)의 시선이 가 닿아 있을 법한 형상의 안쪽 면에는 그저 밋밋한 평면이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 흔히 인체의 안쪽 어딘가에 마음에 해당하는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어떠한 식으로든 작가에 의해 그 마음이 형상화되어져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여지없이 허문다. 그런데, 정작 그 아무 것도 없는 평면은 마음이 맞다. 이를 대면하는 사람들 저마다의 마음이 그려낼 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그 이미지로 채워질 잠재적인 공간이며, 따라서 비어져 있으면서 채워져 있는 허와 무와 공의 가시화된 형상인 것이다.
이와 함께 그림자의 그림자는 장 보드리야르의 이미지의 이미지를 닮았다. 여기서 그림자의 그림자는 사실상 무한정 복제되고 재생산되는 그림자를 의미한다. 처음에 그림자는 주체와의 유사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주체로부터 멀어진 그림자의 그림자는 주체와의 유사성을 상실하고 만다(이를 미셀 푸코는 유사와 구별해 상사라고 일컫는다). 비교해 볼 수 있는 주체를 결여한 그림자, 그림자가 낳은 그림자, 해서 마침내 자족적인 존재성을 획득하기에 이른 그림자, 비교해 볼 수 있는 주체가 없으므로 스스로 주체가 된 그림자에서 재현의 논리는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주지하다시피 재현된 이미지(주체를 재현하고 있는 그림자)는 실재와의 닮은꼴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처럼 비교해볼 수 있는 실재를 결여한 이미지(그림자의 그림자)는 재현의 논리를 넘어 순수한 이미지 놀이의 단계로 진화(?)하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있는 것을 있다하고 없는 것을 없다하는 것은 다만 순수한 마음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교의 교리처럼 그림자의 그림자는 감각적 현상에 구속받지 않는(실재와의 닮은꼴에 연연해하지 않는) 마음의 절대 경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로써 근작에서 더 뚜렷해지고 있는 (자기)반복과 (자기)분열과 (자기)복제의 양상이나, 더욱이 전에 없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원색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오히려 그 희박한 실체를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처럼 읽힌다. 이를테면 그 이면에 가시적인 구조와 색채 너머의 비가시적 실체(마음)를 보라거나, 가시적인 인체 또한 사실은 알고 보면 마음이 그려낸 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작가는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를 다르게는 <바라보다>로 명명하기도 한다. 자기를 바라본다? 자기를 바라보는 자기를 바라본다? 자기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그림자가 (자기가 유래한 실체인) 자기를 바라본다? 이 명명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물음들을 파생시킨다. 그리고 그 물음들은 자기반성적인 물음 곧 나, 자아, 주체, 에고로 부를 수 있는 실체에 대한 물음의 언저리에 모인다.
대개는 내가 나의 또 다른 분신과 대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이 상황을 통해서 작가는 내가 나를 본다는 것, 그리고 내가 나를 재현한다는 것의 가능성을 묻는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가능성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에게 인체는 그저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닌, 의미론적이고 추상적인 기표들이 표시된 일종의 지도(인체지도)이며, 심리가 투사된 흔적(심리지도)이며, 욕망이 전개되는 장(욕망지도)이다. 결국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재현하는 것)은 이런 기표들이 작용하는 방식을 밝히고, 심리와 욕망이 전개되는 무형의 장(혹은 프로세스)을 가시화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나라고 믿고 있는 실체 즉 나라는 선입견)와 나로서 제안된 실체(재현된 나)를 비교하는 반복과정이 작업의 핵심인 것이다(결론적으로 말해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나에 대한 인식론이 곧 차이에 대한 인식론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인체를 소재로 한 작가의 조각은, 특히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에 나타난 조각은 거칠게 말해 나라고 부를 만한 실체는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과 관련된 물음과 답안이 다양한 유형으로 전개되고, 진화되고, 심화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때때로 사회적 주체(혹은 이데올로기적 주체로서, 이와 관련하여 알튀세는 사회가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하여 잠재적인 주체를 진정한 주체로서 호명한다고 한다)와 만나지고, 심리적 주체(혹은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체로서, 이는 특히 실존주의의 부조리의식과 자기소외의식,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자기분열 양상과 관련이 깊다)와 겹친다.
중력과 무중력, 작용과 반작용, 실재와 표상, 상과 허상, 정신과 몸. 김영원의 조각에 나타난 화두다. 김영원은 조각을 매개로 이 화두들과 씨름하는 선승 같다. 그 속에는 관계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고, 역학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고, 긍정과 부정이 그 경계를 허물고 혼재하는 모순율과 모순어법에 대한 인정이 들어있고, 있음과 없음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몸을 섞는 역설에 대한 포용이 들어있고, 구분과 경계가 허물어져 마침내는 지워지고 마는 공과 허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고,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를 긍정하는 지양(부정함으로써 긍정하는)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다.
처음에 이 역학은 물리적인 현상을 의미했다. 철봉대를 맞잡은 손이나 기댄 몸에 빈 홈이 생기는 식이다. 무언가에 매달려 있는 몸이 헛몸짓으로 허공중에 붕 떠 있는 식이다. 여기서 사물과 나와의 관계는 물리적인 현상이 내 몸에 남겨준 흔적과 이로부터 환기되는 기억의 형태로서 현상한다. 그리고 점차 그 역학은 인식론적인 차원으로 넘어간다. 있음이란 무엇이고 없음이란 무엇인가. 실재와 표상을 구분하게 해주는 경계는 무엇인가. 나, 자아, 주체, 에고를 손에 쥐게 해주는 어떤 실체가 있는가. 나는 그 무엇인가로 꽉 차 있는 총체인가 아니면 텅 빈 공이고 허인가. 나를 나이게 해주는 것은 결국 너와는 다른 나의 관점이 아닌가. 그리고 그 관점이란 그 자체 항구불변의 것이기보다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상황논리에 기인한 가변적인 것이 아닌가. 나와 나의 관점이 동격임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그 관점이 가변적인 것임을 인정한다면 나 역시 가변적인 것이 아닌가.
어떤 관점의 소유자로서의 나는 있다. 그리고 지나가고 흘러가고 마침내는 사라지고 마는(다른 관점으로 대체되는) 관점처럼 나는 없다(나는 다른 나로 대체된다).
이런 자기에 대한,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 물음의 여정이 끝나는(혹은 매번 새로이 시작되는) 지점에 그림자의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의 그림자는 이미지의 이미지, 표상의 표상, 가상의 가상, 시뮬라크르의 시뮬라크르와 동격이다. 그 속에는 그림자를 만들어준 실체가 없고, 이미지를 만들어준 원본 혹은 모본이 없고, 표상이 유래한 실재가 없고, 가상이 유래한 현실이 없다. 오직 공과 공끼리의, 허와 허끼리의 짝짓기가 있을 뿐이다. 그림자의 그림자는 그림자의 원인인 실체를 부정하고, 종래에는 그림자 자체마저도 부정한다. 변증법에서의 이중부정은 절대긍정에 이르는 과정이다. 나는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가 있고, 없음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있을 수 있다.
그림자의 그림자를 주제로 한 김영원의 조각은 나, 자아, 주체, 에고가 비록 한갓 인식론적 개념에 지나지 않지만, 그리고 그 인식론적 유희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그 실체가 이런 인식론적 행위(그 자체 불완전한 인식이며 불구의 인식론적 행위)가 아니고서는 결코 거머쥘 수 없는 것임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