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생학에서 제의에 이르는 정화의 메신저생각하기도 끔찍한 바퀴벌레의 모습을 100배 정도 확대한 그림들은 그자체가 재난의 현장이다. 원래 크기에 가까운 것들 역시 그 군집적 형태로 더욱 징그러운 느낌을 준다. 그것들은 모든 화면에 출몰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재조차도 어떤 증후를 예시한다. 요컨대 그것들은 나타나기 직전, 또는 막 사라진 직후일 뿐이다. 현전 또는 부재하는 바퀴벌레의 고난이나 죽음은 안도감을 주며, 마땅히 그래야 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정관념과 오해의 산물이다. 바퀴벌레 역시 지상의 피조물 중 가장 정교하게 생긴 류(類)의 하나이다. 작가의 조사에 의하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바퀴벌레는 수 백 종이며, 이 중에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불과 너 댓 종에 불과하다. 바퀴벌레에 대한 인간의 피해망상은 ‘인간’ 이외의 타자를 오물로 취급하는 문명의 지나친 위생관념의 산물이다. 바퀴벌레에 깊이 새겨진 타자적 형상으로 인해, 그것은 정화의 메신저가 된다. 선호준의 작품에서 정화는 단지 피상적인 위생학을 넘어서 제의적 차원에 까지 이른다.
그러나 작품의 주요 소재와 주제로 채택되는 것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에게 바퀴벌레는 자연과 문명의 관계를 예술적으로 다루어 보겠다는 거창한 틀 거리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바퀴벌레는 신림동 고시촌의 싸구려 하숙방에서 불을 켜면 스르르 움직이던 것들에서 왔으며, 그림일기처럼 일상을 기록하라는 과제 속에서 바퀴벌레의 출현 지점과 죽인 지점 등을 하나하나 기록하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잠재적인 지도는 몇 년 후에 고지도 그리기로 나타났다. 지도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그 위에 바퀴벌레를 올리자 지도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바퀴벌레는 늘 어떤 지형도 속에 등장하며, 지형도는 메시지가 전달되는 상징적 무대이기도 하다. 지형도는 깊은 동굴 속부터 별자리에 이르는 다양한 계열을 가진다. ‘그림 같다’라는 표현도 있듯이, 답답한 지금 여기를 떠나게 하는 이국적 풍경이나 따스한 인간애의 표현, 창조의 기적을 알려주는 자연이나 역사상에 있었던 숭고한 사건 등, 그림으로 그려질 법한 긍정적인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싫어하는 바퀴벌레라는 소재를 수년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악취미인가, 아니면 독특한 것만을 찾아다니는 현대미술 특유의 위반적 충동인가. 어쨌든 우연찮게 시작되었던 바퀴벌레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를 감염시켰고, 관객에게 바퀴벌레의 입장이라 할 만 한 것들을 드러내게 된다. 배를 드러내고 죽은 거대한 바퀴벌레 배경이 만다라인 작품은, 사체 위에 수없이 뚫려있는 총구멍이 무색하게 추모하는 느낌마저 준다. 거대한 빌딩 사이로 뒤집힌 채 죽어가는 바퀴벌레는 문명과 바퀴벌레 사이에 그어진 적대적 관계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들의 운명이 처음부터 비참했던 것은 아니다. 다홍빛으로 칠해진 작품은 바퀴벌레가 지구의 주인이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낭만적 풍경은 지금은 부재한 실낙원이다. 고려 불화에서 부처의 영험함을 부각시킬 때 사용하는 구름 역시 긍정적 도상이다. 동굴 속에 모여 있는 바퀴벌레 떼 역시 대 자연 속 그들의 자리 중 하나이다. 그러나 문명 속에서 그들의 위치는 취약하다.
작품 속 직선들은 쇠창살, 빌딩, 도시 등을 떠오르게 하면서 그것들을 가두고 있으며, 걷어지기 직전 또는 직후의 베일 또는 구름 같은 형상들은, 바퀴벌레들을 보여 져서는 안 될 부정적 존재로 만든다. 선호준의 작품에서 바퀴벌레와 함께 바퀴가 나타나는 것은 단순한 동음이의어 말장난만은 아니다. 양자의 또 다른 공통점으로 어둡고 빠르다는 점이 있다. 인간의 청결한 보금자리를 침범한 바퀴벌레를 잡아 죽이려고 할 때 그것만큼 빠른 게 없다. 바퀴 역시 빠른 속도로 시공간적 경계를 넘나든다. 그러나 죽어 없어져야 할 바퀴벌레의 빠른 속도는 부정적인 것이고, 무한 속도를 향한 자동차의 질주는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하나는 퇴행이고 하나는 진보로 간주된다. 그러나 잠재적 또는 명시적 전쟁터에서 바퀴가 수행했던 역할을 떠올려 볼 때, 진보란 더 빨리 더 많이 죽게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무엇보다도 바퀴벌레는 브레이크도 없이 질주하는 문명의 도구에 의해 깔아 뭉개져야할 것들이며, 인간(만)의 서식지에서 바퀴벌레의 출몰 정도는 문명화의 척도가 된다.
바퀴벌레는 시공간을 단축시킴으로서 인류 문명사에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평가되는 바퀴 이전에도 존재했고, 인류 문명이 종말을 맞는 바퀴 이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사실 인간이 먼저 바퀴벌레의 자리를 침범한 것이며, 인간이 문명을 이루어 몰려 살게 됨에 따라 바퀴벌레 또한 이상 증식 된 것이다. 말하자면 바퀴벌레적인 현상, 또는 사태라 할 만한 것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문명의 산물이다. 그의 작품에서 바퀴벌레는 그것만이 아니라,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동일자)과 바퀴벌레(타자)는 반대가 아닌 짝패의 관계를 이룬다. 이 전시에서 바퀴는 의인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B 보이와 여자 무용수가 조합된 그림은 바퀴벌레가 죽어가는 모습과 춤이 유사하다는 것에서 왔다. 끝없이 굴러가는 바퀴는 반복 속에 내재된 죽음 충동을 나타낸다. 원시적이고도 민속적인 장신구를 걸친, 토템 적으로 분장한 배우는 바퀴를 옆에 끼고 있다. 의상과 그 주인공은 그자체가 괴물, 즉 경계 위의 존재이다.
수염이 있고 유방은 없지만 긴 머리에 치마 의상 및 장신구에서 여성이 연상되며, 타이어와 염소가 동시에 나오는 라우센버그의 작품처럼 동성애 또는 양성애의 상징을 공유하고, 음침하면서도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그/녀는 동물이면서 인간이다. 길게 휘어진 뿔이 바퀴벌레의 더듬이를 연상시키는 이 기이한 존재는 원시와 현대가 중첩되어 있다. 원시와 현대는 그 물신숭배적인 모습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배경에 깔리는 반복적 전자음이 자아내는 주술적 몽환성은 청각적인 차원에서 원시와 현대의 가교가 된다. 우선 속도에 대한 현대의 광신 에 내재된 부조리를 발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바퀴 벌레 같은 타자적 존재를 희생양으로 삼아 인간 사회의 질서를 세워온 역사의 구조적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그자체가 야만의 기록이기도 한 인간의 역사에는 적지 않은 개인, 민족, 당파 등이 바퀴벌레 취급을 당하며 사라졌음이 기록되어 있다.
죽어 뒤집어진 바퀴벌레에 뚫린 총구멍은 이중의 공포를 자아낸다. 그것을 죽이기 위해 한방으로도 충분했었을 강박적이고 도착적인 흔적은 공포와 공격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준다. 공격은 공포의 산물인 것이다. 또한 바퀴벌레가 직접 나타나지 않는 그림들은 특정 대상이나 상황과 관계있는 공포와 명확한 대상이 없는 불안의 차이도 나타낸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불안에는 애매모호하고 대상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불안이 대상을 찾아내면 불안 대신 공포라는 말을 사용한다. 딜런 에반스가 편집한 [라깡 정신분석 사전]는 불안이 먼저이고, 공포증은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불안을 공포로 바꾸는 방어라고 말한다. 실체가 없는 불안으로부터 시작된 공포는 공격을 야기한다. 찰스 프레드 앨퍼드는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에서 악의 근원은 두려움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악은 형태 없는 두려움을 타자에게 폭력적으로 침입시킴으로서, 그것에 형태를 부여하고 자기로부터 배설하려는 편집-분열증적인 기도이다.
우리 자신의 형태 없는 두려움에 형태를 제공하고자 타자의 몸을 이용하는 것이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자를 겁주고 희생시킴으로서 두려움을 부과하고, 그것에 형태를 부여한다. 이때 타자는 두려움의 형상을 그려 넣을 틀과 같은 것이다. 그 형상은 그리기도 전에 틀에 끼워 넣어야할 그림이며, 일단 그리고 나면 두려움을 상기시키지 않도록 즉시 파괴해야할 그림이다. 우리는 타자를 파괴함으로서 자신의 두려움을 파괴하려 한다. 악은 타자에게 파멸적인 운명을 부과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선호준의 작품에서 악한 타자의 역할을 맡은 것은 물론 바퀴벌레이다. 앨퍼드의 결론은 두려움과 소통하는, 즉 두려움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그것에 창조적 형태를 부여하는 사회적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앨퍼드의 논의는 ‘악’이라는 다소간 서구적 종교 관념에 빗대어 서술되어 있지만, 불안과 공포, 그리고 공격성이 서로 꼬리를 물며 출몰하는 선호준의 그림을 해석하는 하나의 틀이 되어줄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바퀴벌레의 비천함(abjection)은 그자체가 아니라, 경계 위에 있는 것의 모호함에서 비롯된다. ‘make it count’라는, 전시부제이자 과제는 타자를 정확히 위치 짓기 힘듦, 그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듯하다. 헤아리기도 분류하기도 힘든 이 경계 위의 존재는 오염(defilment)의 상징체제와 밀접하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순수와 위험]에서 순수를 위협하는 절대적인 의미의 오물이란 없다고 본다. 깨끗함과 더러움을 가늠하는 기준은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체계의 부산물이다. 그녀의 논의에 의하면, 더러움에 내재된 무질서는 깨끗한 질서를 조직하는 원동력이다. 바퀴 벌레 같은 존재를 제거하려는 충동은 단지 오물이라는 부정적인 것을 없애는 것을 넘어, 인간적 환경을 조직하려는 적극적 노력이다. 오염에 대한 고찰은 질서와 무질서, 존재와 비존재, 형태와 무형태, 생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의미한다.
무정형의 혼돈은 붕괴의 시작이 되면서, 발단과 성장의 상징이 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메리 더글라스의 오염의 개념을 비천함에 대한 이론에 적용시킨다. ‘오염의 기준은 인간의 신체’(메리 더글라스)이듯이, 비천함이란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경계가 와해되는 것에서 오는 공포 또는 열락이다. 바퀴벌레의 비천함은 그것이 인간의 반대 항이 아니라, 인간과 유사하다는 것에서 온다. 그것은 주체의 일부이며, 몰아내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대상이다. 바퀴벌레라는 소재 뿐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경계는 불확실하다. 선호준은 사고로 작품에 묻은 얼룩이나 우연히 죽어 붙어있는 벌레도 그대로 작품의 조형요소로 내버려 두곤 한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비천한 것’의 주된 표현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비천한 것은 ‘내면이며 외면’이고, 시체처럼 ‘죽었으며 살아있고’, 전염병처럼 ‘자주적이며 휘말려들어’ 간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과 육체적 경계선들에 대해 불안하게 파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힘]에서 육체의 내부는 안/밖의 경계선의 붕괴와 정서의 난입 과정에서 떠오른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더 이상 고유의 통일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 고유성의 결핍을 지닌 주체의 상태를 똥, 오줌, 피, 정액, 토사물은 확인시킨다. 내부로부터 분출된 이 같은 비천함에 대한 논의는 심리학 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중요하다. 크리스테바는 안정된 주체/대상의 구분을 위협하는 비천함에서 가장 원시적인 문화부터 가장 현대적인 작가를 움직이는 힘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공포증과 강박증, 그리고 도착증의 교차점에 비천함을 놓는다. 그녀에 의하면 비천함의 주체는 발군의 문화적 생산자이다. 비천함의 증상이란 언어를 파기하고 난 이후의 구축인 것이다. 인간과 서식지를 공유함으로서, 또는 상호 침입함으로서 비천함을 자아내는 바퀴벌레는 탈중심화 된 주체(decentered subject)와 이행대상(transitional object)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것은 문명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배제하는 것이다.
경계와 차이를 강조하는 상징적 질서는 비천함이 야기하는 위협을 금기시하고 억압한다. 그러나 비천함은 역겨우면서도 기묘한 매력이 있다. 정체성과 조직, 질서를 방해하는 것에서 우리는 양가 감정을 가지는 것이다. 선호준의 바퀴 인간에서 느껴지는 기괴함이나 그로테스크 또한 친근함과 낯섦, 정상과 이상 사이에 그어진 가는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에서 오는 미묘한 느낌이다. 바퀴벌레와 바퀴는 이곳과 저곳, 지금과 다른 때를 구분하는 경계를 끊임없이 위반한다. 그것은 구별 자체를 위협함으로서, 체계를 교란시키고 체계를 다시 세운다. 인류학자와 언어학자, 심리학자들은 비천한 것에서 인간적 사회의 질서 잡혀진 모든 구조의 역학 속에 모종의 역할을 발견한다. 선호준의 작품은 예외적이고 금기시된 주제를 전면화함으로서, 예술 또한 그러한 보편적 과정에 속해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즉 예술 또한 어떠한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사회와 주체가 구축된 가장자리에서 작동하면서 그 경계의 허약성과 가변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