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미술 새로 보기②] 친일미술의 시대적 변천
최열
[친일미술 새로 보기②] 친일미술의 시대적 변천
국외에서는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와 독도 문제로 시끄럽고, 국내에서는 친일인명사전 예산 삭감, 특별법 무산에 따른 네티즌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열기가 뜨겁다. 일본은 과거를 뉘우치지 않고 뻔뻔스러워지고 있다.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이보다 한술 더 떠 민생현안은 외면한 채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사리사욕에 침 흘리며 점점 더 뻔뻔스러워지고 있다. 이에 <민족예술>은 올해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친일문제가 될 것임을 확신하며 문학에 이어 미술에서의 친일성에 관한 총 여섯 차례의 기획을 마련했다. 미술분야의 친일미술 행위를 범주화하고 그 발자취와 실상을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독자들의 관심을 부탁드린다. - 편집자주 -
연재순서
●친일미술의 개념과 범위 ●친일미술의 시대적 변천 ●친일미술의 분야 - 주요 집단과 활동을 중심으로 ●미술가와 친일 1 - 수묵채색 ●미술가와 친일 2 - 유채 ●미술가와 친일 3 - 조소, 삽화, 만화, 표지화
시기구분
친일미술행위의 발자취는 1909년 초대통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조선인 서화가 윤영기(尹永基) 사이에서 출발했다. 이때부터 시작한 행위는 해방 직후 1946년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와 김인승, 박영선 사이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38년 동안 이어진 행위는 시대의 성격에 따라 변천을 거듭했는데 크게 보면 일제가 1937년 조선에서 황국신민 서사 시행강요, 조선의용대 조직에 이어 1938년 조선 지원병제도인 육군지원병령 시행, 국가총동원법 조선적용 공포로 이어지는 전시체제 전환기를 분기점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기점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1938년 11월 일본 수상의 동아신질서 성명과 1940년 6월 일본 외상의 대동아공영권 건설 발표로 이어지는 대동아 전쟁기였다. 따라서 38년 가운데 분기점을 축으로 하여 1차와 2차로 나눌 수 있는데 구조와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1차시기는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상하 위계질서를 갖춘 협력을 특징으로 삼는 시기였고 2차시기는 내선일체와 멸사봉공으로 무장한 전시체제 질서에 복무하는 가담을 특징으로 삼는 시기였다. 특히 2차시기의 경우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건설 전쟁에 복무하는 국가총동원시대에의 가담이라는 점에서 행위의 정도가 지극하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할 것이다. 그런데 1차시기의 경우 복잡성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를테면 체제순응 노선이나 개량화 노선은 물론 타협적 자강노선과 비타협적 자강노선 또는 무장저항투쟁과 반합법 저항운동의 범주가 다양하게 중층화되어 있던 시절인 1차 시기에서 미술행위의 성격은 단순히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 친일미술행위에 대해서는 해당 행위자의 여러 측면을 아울러 판단을 해야 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구조와 성격에서의 각각의 특징은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일 뿐, 이것이 그 행위의 질에서 근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라거나 아예 본질이 다른 시대라고 하는 것은 오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전제하고 1차와 2차시기로 나누어 친일행위의 발자취를 개괄하고 덧붙여 제 3차시기까지 언급해 두고자 한다.
제1차시기 - 친일미술계의 형성
친일미술행위의 기점은 1909년부터다. 이 해에 윤영기는 이토오 히로부미와 어울리면서 미술원 설립 지원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저격을 당하면서 지원을 얻는데 실패하자 다시 친일매국귀족 이완용(李完用), 조중응(趙重應)에게 접근했다. 이에 성공한 윤영기는 을사오적의 한사람인 이지용(李址鎔)으로부터 건물을 얻어 서울 종로에 경성서화미술원을 설립했다.
그런데 이완용은 윤영기를 밀어내고 미술원을 장악한 다음 1912년 조선서화미술회를 창립하고 스스로 회장에 취임했다. 여기에 안중식, 조석진, 김응원 들이 교수로 나섰고 이들은 물론 정대유, 강필주, 강진희, 이도영이 어울리며 그림도 그리고 술도 마시며 매국노의 미술문화사업에 함께 하였다. 서화미술원은 1914년에 다시 이지용(李址鎔)으로부터 관철동 건물을 얻어 서화미술회 강습소로 재편했고 여기서 3년 과정의 학사과정을 두고 1920년 폐회할 때까지 모두 네 차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김규진(金圭鎭)의 서화연구회도 회장에 친일매국귀족 김윤식(金允植), 부회장에 조중응을 추대했다.
그 뒤 1918년 5월 서화협회 발기회가 열렸다. 전조선의 서화가를 망라하고 신구 서화발전, 동서 미술 연구를 내세운 서화협회 발기인은 당대 서화계의 거장들이었다. 안중식, 김규진을 중심으로 하는 13명이 발기인이었다. 뒷날 연구자들은 이 단체를 ‘민족서화가 단체’라고 했다. 그러나 그 해 7월엔 친일매국귀족 이완용 등과 어울려 휘호회를 열고 또 10월에 열린 제 1회 정기총회 때엔 그들을 대거 추대했다. 김윤식은 부총재, 이완용(李完用), 민병석(閔丙奭), 박기양(朴箕陽), 김가진(金嘉鎭) 따위는 고문으로 말이다.
이 시기 친일미술행위는 친일귀족 따위를 단체에 추대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전람회를 개최하면 의례히 조선총독부 최고급 관리와 매국 귀족을 초대했다. 1913년 6월에 열린 서화미술회 대전람회에는 이완용, 박기양은 물론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山縣)의 작품이 출품되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이처럼 총독부 관리, 친일귀족, 일본인 미술가들과 어울리는 행사가 연이어 계속 되었는데 그야말로 조일, 관민 사이에 우호선린이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심지어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박람회 공진회에 당대의 거장들이 응모 출품했고 그 가운데 안중식과 김관호가 은패를 수상하는 일이 펼쳐졌다. 심사위원장을 해도 부족했을 당대 거장 안중식이 일본화부에 응모하여 은패를 수상한 일은 촌극의 테두리를 이미 넘어선 사건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문제를 거론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이러한 협력은 계속되었다. 서화연구회는 1917년 5월 서화대전람회를 열어 야마가타 정무총감과 이완용, 김윤식의 작품을 진열했다. 안중식도 경묵당(耕墨堂) 설립 1주년 기념 휘호회에 이완용과 더불어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화가들까지 초대했다.
그리고 이 무렵에 이르러 개인들 또한 친일미술행위를 빈번히 저지르기 시작했다. 채용신(蔡龍臣)은 1917년에 총독부 관리 이토우 시로우(伊東四郞)과 어울려 일본 여행을 떠나 조선 침략의 원흉인 노기 마레쏘케(乃木希典) 대장 따위의 초상화를 그렸다. 의병장과 민족지사 초상을 즐비하게 그려내던 채용신의 이 같은 변절은 세계관의 불철저함에 따른 시대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두 명의 서화가의 경우는 적극성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서화가 김우범(金寓範)은 킨우초우한(金禹鳥範)으로 창씨개명을 한 뒤 1917년 7월 강경에서 서화회를 열고 일본여행을 떠났다. 또 평양의 서화가로 서화협회 회원인 김유탁(金有鐸)도 카네코 요시타로우(金子吉太郞)로 창씨개명을 하고 1921년에 인천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화협회의 친일행적은 1919년 민족해방운동 뒤에도 지속되었다. 1921년 4월에 개최한 제 1회 협회전에는 미즈노(水野) 정무총감이 방문하였고 또 10월에 발간한 『서화협회 회보』 창간호에는 사이토우(齋藤) 총독과 미즈노(水野) 정무총감 그리고 이완용, 김윤식을 비롯한 친일매국귀족의 글씨를 게재해 놓았던 것이다.
한편 1921년 12월 서화협회 고문이자 친일매국귀족 민병석(閔丙奭)과 3대 회장 정대유, 4대 현회장 김돈희, 도서발행부장 이도영, 서화연구회 김규진은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고 회의에 참석하여 총독부의 조선미술전람회 창설 계획에 만장일치의 찬성과 지지를 보냈다.
다음 해인 1922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미술전람회 기구가 구성될 때 이도영, 서병오, 김규진이 제 1부, 이완용, 박영효, 박기양, 김돈희, 정대유가 제 3부 심사위원으로 가담하였고 또 이도영이 5대 회장 격인 간사장으로 재임 중인 서화협회는 회원들로 하여금 조선미전에 응모, 출품을 독려하였던 것이다. 또 서화협회는 1923년 11월 새 건물을 마련하고 서화학원을 설치하여 개교식이라 할 피로회에 사이토우 총독을 초대하였다.
이처럼 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일제와 협력 또는 아예 그 체제에 편입되어 하나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때를 제 1차 친일미술행위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오랜 세월은 조선미술전람회라는 최대 규모의 연례공모전으로 빨려 들어가 이른바 일제가 장려하는 바의 심미주의 미학과 향토색 화풍을 일구어 나갔다.
제2차시기 - 친일미술의 완성
제 2차시기를 상징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김은호가 금비녀를 헌납하는 운동을 펼치자는 친일여성단체인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활동을 소재 삼아 그린 대작을 조선총독부에 헌납한 일이었다. 김은호의 이러한 활동은 친일미술사의 제 2기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1938년부터 일제 황군의 전적지를 종군한 두 명의 화가가 1939년에 연이어 종군화가전람회를 열었는데 8월에는 지성열(池成烈), 11월에는 송정훈(宋政勳)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친일미술사를 전시체제 미술활동으로 전환시킨 결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 해인 1940년에 열린 제 19회 조선미전에는 심형구(沈亨求)는 <흥아를 지킨다>라는 작품을 냈고 또 구본웅(具本雄)은 5월에 발표한 글에서 ‘신동아 건설’을 위하여 미술인들이 화가로서 보국을 꾀함에 신회화의 제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창작과 이론에서 전시체제 미술사를 본격화했던 것이다.
심형구도 이에 뒤지지 않고 ‘신동아 건설의 대임(大任)을 쌍견(雙肩)에 지고 국가적으로 일대 약진을’ 하고 있는 터에 일대 각오를 다진다고 주장하였고 구본웅은 다시 7월에 <사변과 미술인>이란 글을 발표하여 중일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신동아 건설을 위하여 미술의 무기화에 힘쓸 것을 제창했다. 구본웅은 글의 끝에 “미술인이여!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가진바 기능을 다하여 군국(君國)에 보(報)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이러한 주장은 헛된 구호가 아니었다. 실제로 이 해 말 심형구가 참가한 황도학회(皇道學會)가 출범하였고 사상교육기관인 대화숙(大和塾)과 더불어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재출발하였거니와 비로소 전시체제 아래 후방지역의 조직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부응하여 1941년 새해 벽두 조우식(趙宇植)은 미술이 국가에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를 논한 「예술의 귀향 - 미술의 신체제」란 글을 발표하여 국가가 의도하는 문화정책의 신체제를 따라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전시체제 미술동원은 조선미술가협회 결성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산발적으로 이뤄졌던 친일미술사가 비로소 조직화를 이루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대한 시국’에 미술가 본래의 사명인 직역봉공을 목표로 삼은 협회의 발기인 가운데 조선인은 김인승, 심형구, 이상범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그간 정치색을 크게 보여주지 않았던 조선미전에서도 이른바 전시체제 미술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2년 제 20회 조선미술전람회 때 추천작가로 오른 김경승은 소감에서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할 것이며 ‘대동아 전쟁 하에서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중대한 사명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다 하겠다’는 결의를 밝혔거니와 1943년 제 21회 조선미전 시상식장에서는 장우성이 ‘총후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하여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하였던 것이다.
제 2차시기의 친일미술행위는 그밖에도 숱하게 많았다. 특히 단광회, 반도총후미술전람회, 결전미술전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일제 말기 전시체제 친일미술행위의 절정이었다. 황군위문용 부채그림 헌납 따위 행위와 더불어 이 같은 전람회는 물론 그밖에도 ‘무적 일본 해군의 위용’ 따위를 전파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현지파견에 참가한 행위, 징병제실시를 기념하는 시화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에 참가하는 행위 따위가 즐비하게 이어졌다.
그 가운데 친일미술 행위의 절정은 1944년 3월 총독부미술관에서 열린 결전미술전이었다. 이 전람회는 조선미전에 버금가는 양과 질을 자랑하는 전람회로 알려졌거니와 그러나 정작 출품작과 작가 명단조차 제대로 확인된 바 없었다. 이런 사정은 1942년과 1943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총후미술전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역사 사실에서 영원한 은폐는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결전미술전의 경우 지금까지는 심사원으로 김경승, 출품자는 윤효중, 이국전, 조규봉만이 밝혀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 김복기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에 대한 일련의 조사 결과 ‘양화지부’에 조병덕, 한홍택, 배운성, 안영배, 방덕천, 조남표, 현충섭, 안상목, 성낙인, 류전호, 김광일, 심형구, 박영선, 정온녀, 박명철, 김인승, 이봉상, ‘조소지부’에 이국전, 김남표, 윤효중, 김경승, 조규봉, 한재홍, ‘일본화지부’에 박봉수, 김화경, 이건영, 조복순, 정운면, 정홍거, 정종녀, 배렴, 김기창, 김정현, 장우성, 김시종, 이상범, 박래현, 이경호, 이유태가 출품하였음이 밝혀졌다. 이들 가운데 심사원은 김인승과 심형구, 조선군보도부장상에 김기창, 경성일보사장상에 윤효중, 특선에 조병덕, 조규봉, 정종녀, 이건영, 박래현이 돋보이고 있으며 특히 이들의 작품 명제는 모두 ‘결전’에 걸맞은 전투적인 것이었다. 이 밖에도 창씨개명 출품자가 상당하여 조사, 연구의 진척에 따라 더욱 늘어날 것이다.
또 하나의 친일
친일미술의 시대적 변천은 시대가 흐를수록 그 형식과 내용에서 강화되어 왔다. 제 1차시기는 논외로 하더라도 제 2차시기의 경우 동원체제라 할 만큼 조직화와 체계화가 이루어졌고 또한 작품의 소재와 주제 방향에서 일제에 대한 봉공의 태도가 뜨겁게 드러나기 시작했음이 매우 뚜렷하다. 그러나 제 2차시기 친일미술행위 진상규명은 여전히 방대한 자료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작품에서 진품의 발굴은 물론, 사진도판조차 흔치 않고 또한 이 시기 전람회의 도록은 물론, 출품작 목록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필자는 그간 여러 연구자가 발표한 친일미술행위 연구 성과를 아우르고 또한 문헌자료 조사를 거듭하여 그 결과물을 1998년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에 포괄한 바 있거니와 그러나 이후 조사, 발굴 작업의 지지부진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진품이건 도판이건 발견 작품의 희소함으로 말미암아 친일미술에 관한 미학 이념 및 조형 해석 연구는 물론 그 개념과 범주의 광범위한 합의 그리고 친일미술역사박물관 건립이나 그 기념관조차 설립이 불가능한 처지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적극 도입한 방법론의 하나가 이 글에서 시도한 시기 구분법을 기준으로 삼는 가운데 작품을 포함하여 조선에 불리하고 일제에 유리한 모든 미술 행위를 조사하고 해당 행위를 대상으로 하여 그 구조와 성격을 밝혀나가는 방법이라 하겠다.
덧붙이자면 해방 직후인 1946년 김인승, 박영선이 ‘전쟁미술’ 작품 151점을 보관하고 있다가 고스란히 일본에 되돌려준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뒤 반민특위 강제해산과 더불어 1980년대에 일어난 성명서 발표, 집회 따위 친일미술행위 진실 규명에 대한 저항행위 그리고 지극한 친일미술행위자가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에 참가하는가 하면 일제에 저항하다 스러져간 이들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는 따위 환상과도 같은 일은 물론, 전후 사과 없는 일제미술계와 교류를 추구해 나간 모든 미술행위까지 포함해 이를 제 3차 친일미술행위로 분류해 범주화하고 조사, 연구해 나가야할 과제가 남아있다 할 것이다.
- 민족예술 2004년 10월호
- 최열 (미술평론가 topste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