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I. 프롤로그 - 상상
본고는 로만 오팔카(Roman Opalka, 1931- )의 작가주의를 연구하는 글이다. 폴란드 출신으로 프랑스로 귀화해서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 노년의 미술가는 1965년부터 현재까지 ‘인생의 프로그램’〈 Le programme de vie, Opalka 1965/1-∞ 〉이라 명명한 단 하나의 시리즈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투사시켜 시간성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1965년 이래 일생 동안 ‘시간의 시각화’라고 하는 일관된 주제를 천착해오고 있는 만큼 그를 연구함에 있어 난해한 ‘시간성’이라는 철학적 명제에 대한 탐구는 그 어떤 것 보다 우위에 있는 방법론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물미술사학적 접근으로 그를 연구함에 있어 자연스럽게 모색될 수 있는 바이오그래피적 요소인 개인 소사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인식마저 시간성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세세히 살피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오팔카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제시되었던 ‘미술과 시간’, ‘인생과 시간’, ‘시간과 공간’, ‘흔적과 기억’같은 시간성과 관련된 주제는 물론이고 ‘창작과정에 개입하는 작가적 윤리’, ‘트라우마티즘과 같은 작가의 성장 배경으로부터 기인하는 심리적 기제의 표출’, ‘집요한 노동을 통한 신체의 매개화’와 같은 작가주의적 주제, 그리고 ‘작품의 형식적 특성에서 유발된 증식어법의 비반복성’, ‘회화 속의 글쓰기’와 같은 작품의 형식연구 관련 주제에서도 일관되게 시간성 탐구가 그 중심에 위치했었던 선(先)연구들에 근거하고 있다.
앞서의 미시적 방법론들을 포괄하면서 필자는 한 철학개념으로부터 연구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 연구 방법론은 오팔카가 직접 기술한 한 텍스트에서 읽은 극히 짧은 텍스트로부터 비롯되었다. 베르그송의 ‘지속(Durée)’의 개념이 그것으로, 연구자는 이를 오팔카와 연관시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지속’의 개념이 ‘시간성’이라는 철학적 개념과 공유하면서도 차별화되고 인간이라는 생기 있는 주체의 개념을 보다 더 강조한다는 사실들이 연구에 대한 동기를 유발시켰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내에 오팔카에 대한 연구도 일천한데다 해외에서도 베르그송의 지속을 오팔카나 그의 작품과 연관하여 접근하고 있는 사례들을 찾아볼 수 없었던 점이 연구의 주요 동기가 된다. 따라서 오팔카에 대한 연구를 베르그송의 지속을 통해 고찰하는 방법론이 출발부터 지극히 작위적일 수 있음을 언급해 두어야겠다.
우리는 이제부터 ‘지속’을 토대로 한 베르그송의 철학을 오팔카의 작가 의식과 함께 실제적인 작품분석을 통해 세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본 연구자가 베르그송 철학의 본래의 모습을 왜곡시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음에도 연구에서 드러난 논의의 과대 확장이나 오판이 있을 수 있겠다. 그것은 전적으로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본 연구자의 오해 혹은 몰이해로부터 근거한 것이다.
II. 묘사 : 인생의 프로그램 〈 Le programme de vie, Opalka 1965/1-∞ 〉
개인적 삶의 시간을 작품화하는 오팔카1)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의 시각화’라는 이전 작업들2)의 주제와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1965년부터 새로운 형식으로 시작된 그의 시리즈 작업인 〈인생의 프로그램〉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생의 프로그램〉이 196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복잡한 형식과 규칙의 대부분은 1972년에 이르러서야 정립되었고, 이때에 비로소 오팔카는 자신의 작업 형식을 정초시킬 것을 결정하는 아래의 텍스트를 발표한다.
오팔카 선언, 1972
내 전 생애의 프로그램이자 본질적인 나의 제안이란 시간과 그것의 정의에 관한 기록으로서 그 진행과정을 기록하는 작업 속에서 표출된다.
단 하나의 날짜, 1965는 내가 시작했던 첫 따블로 작업 데타이(Détail)로부터 기인한다.
각각의 데타이 작품은 무한대의 의미를 열고 있는 이 날짜에 의해서 그리고 개별 데타이 작품 위에 쓰인 첫 번째 수와 마지막 번째 수에 의해서 ‘단일성’을 발현하게 된다.
나는 196 × 135cm(‘여행카드’의 경우는 예외)로 동일한 크기의 캔버스 위에 1부터 무한대에 이르는 수의 점층적인 전개과정을 손으로, 붓으로, 흰색으로, 매번 약 1%씩 밝아지는 배경 위에 써내려간다. 언젠가는 흰색 위에 흰색으로 글씨를 쓸 순간이 올 것이다.
작업실에서 하루의 작업을 마감하는 순간에 나는 진행 중인 ‘데타이’를 배경으로 내 얼굴사진을 찍는다.
각 데타이 작업은 숫자를 쓰면서 동시에 그것을 읽는 내 목소리를 녹음기에 녹음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3)
1965년, 오팔카는 〈 Le programme de vie, Opalka 1965/1-∞ 〉라고 명명한 그의 새로운 시리즈 작업을 시작한다. 그것은 1부터 연속적으로 증가되는 일련의 숫자들을 써내려가는 작업으로 그의 첫 번째 캔버스 작품〈 Détail 1-35327 〉4)에는 1부터 35327까지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이 첫 데타이 제작을 위해서 오팔카는 캔버스 위에 바탕색으로 검은 색을 칠하고 그 위 맨 상단 좌측부터 숫자 1을 쓰기 시작해서 2, 3 식으로 증가하는 숫자를 줄이 끝날 때까지 지속해서 써간다. 계속해서 증가하는 숫자는 다음 줄로 계속 이어져 내려가며 캔버스의 맨 하단 우측에까지 마지막 숫자인 35327에 이르며 첫 번째 작품이 끝난다. 오늘날 도달한 숫자는 5,360,000 5)을 넘어선지 오래다. 196×137cm 크기의 캔버스 위에 0호 크기의 붓으로 쓸 수 있는 글씨의 크기를 오팔카는 ‘가능한 가장 작은 그러나 읽을 수 있는’ 크기로 규정하고 현재까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1968년부터 오팔카는 쓰고 있는 숫자를 폴란드어로 읽어가는 과정을 함께 병행하는데 비교적 명징하고 높은 목소리로 읽어가면서 이를 녹음기에 녹음한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쓰고 있는 숫자의 전개과정을 스스로 확인하면서 숫자를 오기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고안된 것이다. 오팔카는 데타이 작업에서 쉼표나 어떠한 간격도 없이 숫자들을 촘촘하게 붙여서 써내려가고 있는데 이러한 쓰기의 방식이 오기(誤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탓에 ‘따라 읽기’와 ‘음성 녹음’의 방법론의 병행이 필요해진 것이다.
1972년부터 오팔카는 흰색으로 숫자를 쓰는 방식과 녹음 방식에 새로운 방법을 하나 추가한다. 백만의 숫자에 이르면서 계획한 이 방법은 하나의 데타이를 마칠 때마다 다음 데타이의 캔버스 바탕색을 이전의 바탕색에 흰색을 약 1% 첨가하여 만든 색으로 바탕을 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데타이가 거듭될수록 원래 검은 색으로 출발했던 바탕색은 점점 밝아져 언젠가는 흰색 위에 흰색을 쓰게 될 날이 도래할 것이라는 미래를 상상해보게 한다.
1972년부터 고안된 또 다른 형식은 매일의 작업이 끝난 후 작업 중이었던 ‘숫자 따블로’6)의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오팔카가 자신의 얼굴사진 촬영을 위한 조건을 언제나 균일하도록 설정해 두었다는 것이다. 흑백의 사진, 얼굴의 정면, 같은 흰색의 셔츠, 같은 목걸이, 같은 표정, 같은 조명, 같은 촬영기기 같은 조건과 상황이 그것이다.
한편, 오팔카는 캔버스로 된 ‘숫자 따블로’를 지속하는 한편, 1968년부터 스스로 ‘여행카드’〈 Carte de voyage 〉라 명명한 새로운 방식의 데타이 작업을 시작한다. 1992년에 이르러 그만 둔 이 작업은 32.5 × 23.5cm의 크기의 종이에 검은 색 잉크로, 02호 크기의 펜촉으로, 앞서의 캔버스 작업과 똑같은 방식으로 숫자를 써내려가는 작업이다. 이 작업 방식이 고안된 것은 아틀리에에서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여행을 떠나거나 출장을 나가 있을 경우 지속하지 못하는 캔버스로 된 ‘숫자 따블로’ 작업에 대한 애착이 반영된 결과이다. 따라서 ‘여행카드’는 아틀리에 밖에서 할 수 있는 ‘종이 데타이’로 고려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여행카드’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틀리에 안에서의 ‘숫자 따블로’작업이 완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숫자 따블로’가 완성되지 못하면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행카드’는 ‘숫자 따블로’의 맨 우측 하단에서 끝난 숫자를 이어받아 써내려가는 것으로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III. 진술 : 오팔카와 현대미술에서의 시간성
앞장에서 묘사된 ‘인생의 프로그램’의 형식적 특성들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시간을 시각화하는 오팔카의 주제의식’을 유추해본다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팔카가 대면한 시간의 시각화라는 주제의식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한 우리의 논의는 이제 시간의 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또 더 나아가 미술가들의 시간 탐구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살피며 보다 원론적인 차원으로 뒷걸음을 쳐야 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철학에서 시간이란 인간존재의 가장 중심적인 현상7)이란 점에서 시간을 논함에 있어 인간의 주체적 위치를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개인 주체가 감당하는 시간은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흐르기에 인간은 시간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믿지만 철학에서 그것을 정의하기에는 여전히 인간이 부적절한 주체라고 보아 왔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러한 관점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아무도 내게 그것을 물어보지 않는다면 나는 알지만, 누군가 내게 그것을 설명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다.” 8)
여기서 ‘그것’이란 시간을 지칭한다. 파스칼에게서도 시간에 관한 정의란 그저 이름과 사물 사이의 관계일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서 ‘정의는 이름 지은 사물들을 묘사하기 위한 것일 뿐 본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닌’9) 까닭이다. 많은 철학자들의 시간에 대한 탐구는 지속되어 ‘어떤 이는 피조물의 운동으로 어떤 이는 움직임 자체로’ 10)그 정의를 끊임없이 수정해 왔지만 시간에 관한 철학적 탐구는 결국 유한 존재인 인간의 차원을 여실히 확인하는 다른 길이었을 따름이었다. 일반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비가역적 특성은 철학에서 계승되는 시간을 나눌 수도 질서지울 수도 없는 것들로 파악되면서 태어나 살고 죽는 인간의 한시적 조건과 존재 차원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왔다.
구체적으로 현대미술이나 오팔카가 대면하는 시간 인식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 다음의 III-1장과 III-2장을 통해서 살펴본다.
III-1. 현대미술과 시간성
시각예술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 역시 다양하지만 철학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시각예술에서의 시간 인식이 오늘날 철학이 조명하는 ‘시간이 귀결시키는 인간의 유한존재성’같은 것에 집중되지는 않았다. 전통적 인식과 더불어 근대적 성찰도 다분히 형식적 분석에 머무르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것은 장르의 형식적 문맥에 개입하는 시간의 차원을 분석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셈이었다고 할 것이다.
장르 구분이 무너진 오늘날에야 시간이 개입하지 않는 예술의 유형이 없지만 전통적으로 미술은 시간성과는 무관한 예술로 치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문학 같은 시간예술과 회화 같은 공간예술로 구분한 18C 레싱(Lessing)의 저작 『라오콘(Laokoon)』에서 밝힌 견해11)로는 미술은 완전히 시간과 별리한 공간의 차원에만 단지 머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근대적 분석이 유효한 시점에서도 미술에서의 시간은 장르의 형식적 차원에서의 분석이 우세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 온 ‘개별 장르의 통합화’를 풀어내는 다른 관점에 불과한 것으로 본 연구자는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영역확장이라는 탈 장르의 예술유형을 ‘움직임(mouvement)’이라는 시간 개입의 유형으로 파악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전통적인 미술의 유형은 움직임의 환영을 부여하면서 ‘앞서는 것과 뒤따르는 것을 보다 더 잘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12)식의 과거-현재-미래의 구성을 고려해야만 했다. 전쟁 장면을 그린 역사화를 예를 들어본다면, 시간의 흐름이 반영될 수 있는 순차적 이야기 전개의 화면 구성이 필요했던 것과 같은 셈이다.
전통적 미술에서 시도되었던 환영과 더불어 내러티브적 화면 구성 체제는 부동성(immobilité)의 매체적 조건에서 모색된 운동성(mobilité)의 초기형식이었다. 이것이 근현대에 이르러 인상주의, 큐비즘, 미래주의, 옵아트 등을 통해서 ‘시각적 움직임’(mouvement visuel)을 강조하면서 형식의 변모를 취하게 된다. 특히 그 중에서 옵아트는 조각이 공유하고 있는 ‘주항(周航)의 시간(temps de cirumnavigation)’13)이 요구되는 관람태도, 즉 여러 곳을 빙빙 둘러보며 감상하는 태도를 요구함으로써 부동성으로부터 운동성을 마련하는 새로운 단계를 유발시킨다.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옵아트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관객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요구되고 이러한 참여적 태도에 의해서 옵아트는 비로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시각적 움직임’이 강조되면서도 작품이 실제로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특성인 ‘잠재적 운동성(mobilité virtuelle)’이 주요해지는 장르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력에 의한 모빌 조각 혹은 모터와 같은 동력에 의한 키네틱아트에 이르러서는 잠재적 운동성은 퇴색되고 실제적 운동성(mobilité réelle)이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우리들 논의에서 이른바 ‘부동성’의 매체적 조건이 ‘운동성’의 것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운동성의 매체적 조건에서 모색되는 운동성’이란 ‘미술에서의 시간의 시각화’를 자연스럽게 발현시킬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에 초점이 모아지면서 분석되는 ‘시각적 움직임-잠재적 움직임-실제적 움직임’과 같은 발전단계는 미술이 탐구하는 시간성을 풀어보는 한 예일 따름이다. 게다가 주지하듯 이러한 단계적 흐름은 미술사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경향일 따름일 뿐 각 유형의 미술이 순차적으로 생겨난 것은 절대 아니다. 예를 들어 칼더의 모빌이 제작되던 1930년대 이전에 이미 키네틱아트의 유형들은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들14)을 상기해볼만 하다.
미술에서 매체의 형식적 특성 탓에 유발되는 ‘움직임의 유무로 파악되는 시간성’이란 미술이 음악이나 공연과 같은 시간예술의 위치를 모방하는 차원에서 개입되는 시간 개념으로 평가된다. 특히 오늘날 유목주의의 철학 담론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와 맞물리면서 생성되는 미디어아트, 크로스오버, 퓨전아트의 미술 유형들의 창궐은 시간예술이라 칭했던 음악, 공연, 영상 등의 형식적 특성을 공유함으로써 자연스레 시간성의 담론을 개입시켜 왔던 것이라 할 것이다.
III-2. 오팔카와 시간성
현대미술에서 시간의 시각화 혹은 시간성의 탐구가 위와 같은 양상을 드러내 왔다고 할 때, 우리는 이제 오팔카가 시도한 시간의 시각화가 이러한 현대미술의 유형과 어떠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 유효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그의 시간성의 탐구가 어떠한 근원적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는데 집중된다.
이 부분에 관한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팔카는 회화를 근간으로 하는 ‘부동성의 매체적 조건에서 모색하는 시간성’에 충실하면서도, 기존의 회화가 시간성을 탐구하는 제스처로 모색해 온 ‘화면의 구성방법을 통해 시각적 움직임을 창출하려는 식의 노력’15)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체의 특성이 유발하는 시각적 운동성-잠재적 운동성-실제적 운동성이라는 ‘물리적 성질’을 가로지르는데 오팔카의 작업 태도가 존재한다. 그것은 오팔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개념(concept)이란 용어로 함축 정의된다. ‘개념’은 그에게 있어 시간의 시각화나 시간성 탐구를 시도하는 회화 매체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유효한 도구가 된다. 그의 개념은 이른바 ‘개념적 회화’를 통해 구현된다. 그리고 그의 개념적 회화는 60년대 개념미술의 유형적 태도와 차별화를 선언하는데 이는 그가 회화 매체를 굳게 신뢰하는 가운데 잉태된 태도이다. 그것은 바로 회화의 전통적 관심이었던 ‘영원성의 창출’에 집중된다. 역설적인 결론이지만 그의 ‘시간성(temporalité) 탐구는 결국 ‘초시간성(intemporalité)’을 지향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위와 같은 결론이 어떻게 가능할까?
오팔카의 시간성 탐구가 지향하는 것이 결국 초시간성이라는 결론은 오팔카의 실제적 작품을 분석16)해 들어가기 전에 오팔카라는 작가주의에 접근하면서부터 도출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의 ‘진술’에 근거하여 ‘시간에 대한 오팔카의 인식’을 살펴보면서 위의 결론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차분히 논해 보도록 하자.
III-2-a. 개념(concept)과 새로움에의 거부(anti-nouveauté)
오팔카는 그가 대면하는 시간을 시각화하려는 노력을 다른 작가들과 스스로 차별화시키려고 한다. 잠재적인 것이든 실제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운동성을 부과하는 옵아트나 키네틱아트의 유형처럼 혹은 비디오나 영상처럼 매체의 시간적 특질을 활용해서 시간성을 드러내려 하기 보다는 시간성 표현의 한계에 직면한 ‘회화’를 적극 개념화시키는 데서 시간의 시각화를 시도하려 한다. 시간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화면에 그려 넣는 것도 아니고 미래파처럼 화면의 분할 방식을 통해 동시성을 구현하는 식의 유사 과학적 태도를 수행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시간의 가시화를 드러내기 위해 회화를 고수한다. 물론 우리가 II장 ‘묘사’에서 살펴보았듯이 오팔카의 〈인생의 프로그램〉은 사진이나 음성녹음이 부가되는 식으로 ‘회화’에 국한된 장르적 특성을 벗어나 있지만 그 근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숫자로 된 개념적 그림’, 즉 ‘개념적 회화’라 할 것이다.
개념적 회화에 접근하는 오팔카는 시간의 잠재적, 실제적 ‘운동성’을 드러내려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시간의 ‘개념성’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집중한다. ‘회화의 세계에 새로운 존재 이유를 부여하는 것을 개념으로 파악’17)한 오팔카는 자신의 개념적 회화를 통해서 다음처럼 작가의 존재적 성찰마저 시도한다.
“개념적 회화의 실천은 내게 존재의 의미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철학적 해결책에 이르도록 한다.” 18)
결국 오팔카는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물리적인 움직임과 같은 시간의 수량적이고 실제적인 양상을 추구하기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 죽음에 이르는 인간존재의 한계를 직시하는 개념적 성찰을 바탕으로 시간성을 대면하고 있다. 그의 개념적 회화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인식이며 구체적으로 그는 집적되고 증가하는 수들의 나열을 통해서 작가 자신에게 부과된 존재적 시간을 흔적화시키고 물질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의 작업이 1960년대 개념미술처럼 미술의 비물질화를 선언하고 출발하는 유형과는 근본적 인식에서 차별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팔카가 언급하는, “나는 미니멀리스트나 개념주의자들과 이웃하고 있지만 나의 작업은 개념미술과는 이질적인 것이다”19)라는 언급이나 다음 아래의 언급은 오팔카의 개념이 개념미술의 개념과 다름을 천명하고 있다.
“나는 미니멀 아티스트도 개념미술가도 아니다.(중략) 1965년 당시는 개념미술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미니멀과 개념미술의 분위기를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때는 이러한 흐름 속에 나를 함께 묶어둔 서구의 미술시장에 이르게 된 것 뿐이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이러한 류의 미술에 그리고 이러한 유행에 아이디어와 형식의 차원에서 같은 부류에 속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지만, 철학적인 사유 속에서 나의 개념이란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성찰이었다.” 20)
완전히 다른 성찰,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개념미술가 솔 르윗(Sol LeWitt)의 “모든 개념은 물질화될 필요가 없다”21)라는 언급이나 조셉 코주스(Joseph Kosuth)의 “예술의 개념과 예술은 같은 것이다”22)라는 언급에 대한 반기일까? 개념미술이 오브제와 같은 물질화된 시각적 결과물을 뒷전으로 미루고 비물질의 개념을 더 앞세운 것을 상기한다면 오팔카의 발언은 이에 대한 반기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오팔카가 평가하는 미니멀아트나 개념미술에 대한 진술을 검토함으로써 오팔카가 주장하는 차별적 성찰을 추론해 보기로 한다. 오팔카는 미니멀아트나 개념미술의 유형을 ‘무모한 실험(expérimentation)’23)과 ‘새로움(nouveauté)’24)에의 추구로 재단한다. 아방가르드적 실험이나 새로움은 오팔카에게는 다분히 부정적인 미술의 유행처럼 인식되는 것들이었다. “나는 미술에서의 새로움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난 나를 에워싸고 있는 실제에 주목하는 것을 선호한다”25)라는 그의 언급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오팔카는 개념미술이 추구하는 ‘비물질적 개념’을 자신의 개념적 회화에서의 ‘실제적 개념’과 철저히 차별화시켜낸다. 물론 개념미술과 같은 유형을 실험이나 새로움으로만 재단하는 오팔카의 인식은 일견 편협되어 있다. 그럼에도 ‘시간의 시각화’라는 우리들의 논의에 있어서 ‘새로움에의 거부(anti-noveauté)’라는 오팔카의 태도는 1965년 이래 지금까지 단 하나의 시리즈 작업인 〈인생의 프로그램〉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그의 일관된 예술관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III-2-b. 시간성(temporalité)과 초시간성(intemporalité)
스스로 개념미술의 개념과 차별화시키는 오팔카의 개념적 회화는 비물질화를 거부하고 시간의 흔적을 물질화시킴으로써 실제적인 개념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개념을 통해서 의미 있게 모색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개념’을 통한 시간성 구현이 결국 ‘초시간적 불변성(immuabilité intemporelle)’이라는 영원성(éternité)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성이란 계승적 차원을 지속하는 시간과 달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개념’26)이라는 점에서 초시간적 불변성을 지닌다. 이런 차원에서 오팔카가 그의 시간성 탐구를 초시간성 또는 영원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 논의에서 매우 주요한 부분이다.
오팔카의 다음 진술을 살펴보자.
“나는 종교적 신앙으로 신(Dieu, 神)을 신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정신성의 극단적 고양과 연결된 채 실제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상징적인 현현(manifestation)’으로서의 신에게 다가선다. 나는 신이 존재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은 개념적이다.”27)
이러한 진술은 스피노자(Spinoza)의 저작 『윤리』에서 ‘신을 영원성(éternité)과 동일시한 관점’으로부터 빌려온 것으로, 오팔카만의 독특한 사유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신을 개념적 인식으로 대면하는 오팔카는 예술을 신의 개념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시간성과 관련하여 앞에서 살펴본 논의에 바짝 다가선다. 다음의 오팔카의 진술들은 바로 그것이다.
“신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입증해야 할 하나의 이념이다. 그것은 임시성(éphémère)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의지인 것이다.”28)
“내가 예술에서 찾고 있는 본질은 우리들 인간 조건의 차원으로 임시성에 이러한 영원성의 차원을 부여하는 것이다.”29)
오팔카의 논의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술창작에 관한 임시성과 영원성의 연계 고리는 미학적 개념에서 다음처럼 정의될 수 있다. 영원성의 차원을 예술창작행위라는 임시성에 가져오는 것과 임시성의 예술창작물로부터 영원성의 차원이 발현되길 기대하는 것이 그것이다. 즉, 영원성(예술 가치)→ 임시성(예술 창작 행위) + 임시성(예술 창작물)→ 영원성(예술 가치)이 되는 것이다. ‘영원성으로부터 임시성으로(de léternité à léphémère)’ 혹은 ‘임시성으로부터 영원성으로(de léphémère à léternité)’라는 개념 모두 인간존재의 예술행위를 강조한다. 오팔카는 이와 같은 인식을 통해 자신의 시리즈 작업, ‘인생의 프로그램’을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거듭 확인하면서도 영원성, 초시간성의 가치를 지향하는 예술창작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나는 (내 작업을 위해) 결정적으로 존재의 개념을 선택했다”30)라는 언급이나 “나의 예술행위는 인간존재의 변하지 않는 규칙과 다시 만난다”31)라는 오팔카의 진술은 시공간적으로 유한한 인간존재를 인정하고 이로부터 영원성, 불변성과 같은 초시간성을 예술행위로부터 발견해내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더불어 이러한 태도는 1965년 이래 자신의 전 생애를 투여해서 작업하고 있는 〈인생의 프로그램〉에 이러한 초시간성의 의미를 담아내려는 의지와 맞물리게 된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시간을 가시화하면서 시간성의 의미를 탐구하는 오팔카의 작업의지가 예술적 결과물에 물리적 운동감을 부여하는 여타의 미술 행위들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오히려 그는 초시간성을 향해 질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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