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IV. 비교 : 오팔카의 시공간(lespace-temps)과 베르그송32)의 지속(Durée)
우리는 앞서 ‘II장 묘사’에서 오팔카의 시간을 시각화하는 〈인생의 프로그램〉에 나타난 외적 형식과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며 살펴보았을 뿐만 아니라 ‘III장 진술’에서는 미술가로서 시간을 대면하고 있는 오팔카의 존재의식을 그의 구체적 진술을 들어가며 고찰했다.
앞서의 II, III장이 오팔카의 작가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객관적 사실과 진술에 기반한 채 이를 정리하는 차원의 글이었다고 한다면 이번 ‘IV장 비교’는 본 연구자의 적극적인 검증과 분석 의지를 여는 첫 장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물론, 오팔카가 〈인생의 프로그램〉을 통해 시도하는 시간의 시각화가 시공간적 한계에 직면한 인간존재의 성찰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속적으로 고찰하는 관점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IV장 이후부터 시도될 우리의 논의는 오팔카의 존재론적 시간 인식이 베르그송의 지속(durée)이라는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 평가하는데 위치한다. 따라서 IV장부터는 앞서의 II, III장의 객관적 묘사와 진술보다는 오팔카의 시간관과 더불어 그의 작품 〈인생의 프로그램〉에 나타난 ‘의미의 구체적 실제화’를 논하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오팔카의 시간성 탐구가 베르그송의 지속과 무슨 상관성이 있단 말인가?”라는 질문부터 던져야겠다. 질문을 여는 첫 출발을 본 연구자는 서문에서도 언급했듯이 오팔카가 진술한 어느 한 텍스트로부터 가져왔다. 아래를 보자.
“내가 묘사하려 시도한 시간은 베르그송의 시간, 즉 경험적 지속(Durée vécue)이다.” 33)
연구자의 입장으로서는 둘 사이의 연구를 시도하게 만든 직접적인 이유는 사실 “나의 작업은 생의 지속(durée dune vie)만을 보여줄 뿐 그 어는 것도 아니다”34)라는 확신에 찬 오팔카의 진술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연구자가 찾은 다음과 같은 구절은 실제적으로 베르그송을 지칭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의 지속 개념을 자신의 작업과 연관하여 풀이하고 있는 진술로 이 IV장을 여는 또 다른 텍스트가 된다.
“나는 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 자연 본성이 드러내는 지속 속에서의 시간의 변화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죽음에 의해서 그 존재가 정의된다. 그것은 비가역적 지속(durée irréversible)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정서이다.”35)
위의 두 텍스트에서 등장하는 ‘경험적 지속’, ‘비가역적 지속’, ‘인간존재’, ‘생의 지속’과 같은 주제어들은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지속’과 관계하는 용어들이다. 또한 우리가 앞 장에서 살펴본 영원성의 용어 또한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매우 주요하다. 무엇보다 베르그송에게서 영원성이란 관념 속에 그려지는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생명의 영원성’36)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오팔카의 작가적 실존 속에서 모색하는 영원성의 차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양자의 튼실한 연결고리는 이러한 체험적 인식에 존재한다. 이 체험적 인식은 시간을 공간으로 구속하지 않는 상황,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뒤섞여 있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즉 베르그송의 ‘지속’이 ‘공간과 완전히 섞여 있는 순수한 시간(temps purifié de tour mélange avec lespace)’이라는 점에서 오팔카의 ‘시공간적 상호개입의 시간(temps comme linterdépendance spatio-temporelle)’과 구체적으로 비교될 수 있는 튼튼한 출발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르그송 철학의 ‘지속’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간략하게 먼저 살펴보자.
우선 지속이 ‘공간과 완전히 섞여 있는 순수한 시간’이란 차원에서 ‘공간으로 환원되는 시간’과는 차별화된다. 베르그송은 과학, 수학, 천문학이 시간을 공간에 환원시키거나 시간을 공간화하면서 시간을 측량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시간의 본질을 왜곡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서울로부터 수원까지의 거리가 차로 1시간가량 걸린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진술은 베르그송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간의 본질을 오염시킨 과학, 수학이 우리들을 세뇌시킨 결과이다. 베르그송이 간파하는 것은 원래 비가역적(irréversible)인 시간은 결코 동질적이지 않다는데 근거한다. 어제 직장에 출근한 아침 7시부터 8시까지의 시간과 오늘 아침 출근한 동일한 시간은 결코 동질적이지 않지만 수학, 과학적 시간(관)은 이를 ‘물체가 통과하는 공간이나 공간 속에서 일어난 움직임의 측량’으로 동질화시키는 것이다. 여러 사건들 중 7시 이전과 7시 이후의 사건을 분리하여 이야기를 시도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시간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환원하기도 한다.
이렇듯 ‘시계가 부여하는 시간’을 시간의 본질처럼 인식하고 사는 우리들의 태도가 이런 동질화의 오해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학, 과학적 시간, 나아가 일반적인 시간을 베르그송은 현실계에 존재하지 않는 동질적 시간으로 파악한다.37) 베르그송에게 있어 ‘공간 속에 무한히 병치할 수 있는 시간, 즉 동질적 시간은 공간의 4차원38)일 따름으로 현실적, 체험적 시간의 본질과는 다르게 왜곡되어 있을 따름이다.
공간화되지 않고 측량되지도 않으며 이질성으로 결합된 이 체험적 시간의 본질은 지속이다. “시간의 범위는 지속으로 결코 향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시간 안에서 순간, 간격 그리고 양 극단의 특정한 수를 세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결국 시간의 가상적 정지로부터 추출하는 특정한 수일 따름이다” 39)라는 언급이나 “순수지속은 명확한 윤곽도 없고, 수와도 유사성이 없는 상호 용해되고 침투된 질적인 변화의 연속일 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이질성이다.(중략) 지속에게 조금이라도 동질성을 부여한다면 공간을 도입시키는 것이다”40)라는 언급은 위와 같은 사실들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지속이 늘 이질적인 사건과 새로운 변화가 연속되는 시간인 까닭은 현실계의 지평에 선 우리들의 체험적 삶 속에서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지속은 ‘체험적 시간(Durée vécue)’인 것이다. 각 개별 주체가 영위하는 인생 속에서 경험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속은 무엇으로 파악이 가능한 것일까? 베르그송은 그것을 ‘직관’이라 말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 즉 ‘지성(intelligence)’과 ‘직관(intuition)’이 존재한다. 분석적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지성은 특정한 관점에서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대상을 그 전체로서 파악하는 데는 실패할 뿐만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이 지성은 단지 과학적 추론에나 적합한 능력일 따름이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대로 지성에 의한 수학이나 과학은 ‘공간화 된 시간’을 거론할 수 있지만 ‘시간의 본질’은 간과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본질은 본래 역동적이고, 생동적이며 연속적인 존재, 즉 지속이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대상을 이미 알고 있는 공간이라는 요소로 환원하는 작업인 분석은 이 지속을 방해하고 삶과 운동을 정지시킬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의 입장으로서는 연속적이고 생동적인 체험적 시간의 본질은 지성과는 다른 ‘직관’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베르그송의 지속을 보다 개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앞서 언급했던 내용들을 포함해서 그의 철학 속에 나오는 키워드의 연결고리들을 점검해 본다.
지속은 시간(추상적, 과학적, 수학적임을 포함하는)과 다르다. 지속은 공간화되어 있지 않은 시간이다. 지속은 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섞여있는 순수한 시간(durée prurifiée)이다. 연속적인 시간인 지속은 구분이 불가능하고(indivisible) 측량이 불가능(immensurable)하다. 지속은 과거로 돌이킬 수 없고 끝없이 미래로만 흘러가는 비가역적(irréversible) 시간이다. 지속은 동질화되지 않은 시간, 즉 이질적인 새로움(nouveauté hétérogène)과 변화(évolution)의 연속된 시간이다. 지속은 따라서 비반복적(non-répétition)이고 예측불가능(imprévisible)하다. 지속은 우리들 현실계에 존재하는 체험적 시간(durée vécue)이며 인생의 시간(durée de la vie)이 된다. 지속은 과학이나 수학으로 대면하는 시간이 아닌 우리들 인식(conscience)이 대면하는 시간이며 내면적 인생(vie intérieure)의 시간이다. 그것은 다양한 우리들 삶의 양태가 지속되는 것처럼 매우 역동적(élan vital)이다.
따라서 역동적인 삶의 지속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성(intelligence)’으로는 불가능하고 ‘직관(intuition)’이 요구된다. 달리 말하면 직관으로 사유하는 것은 곧 지속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팔카의 〈인생의 프로그램〉(오팔카가 ‘시-공간’이라 표현한)을 작업하고 있는 작가의 시간 인식을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과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려는 몇 가지 단초를 마련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베르그송의 지속이 측량 가능한 ‘공간화되는 시간’과 차별화하듯이 오팔카 역시 자신의 작업을 ‘시-공간’으로 표상하며 측량가능한 시간과 차별화한다.
2. 베르그송의 ‘지속’이 ‘공간과 완전히 섞여 있는 순수한 시간’이자 실제적 시간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팔카의 인생의 프로그램에 나타난 시-공간의 개념(concept lespace-temps)은 시공간적 상호개입의 시간을 의미한다.
3. 베르그송의 지속이, 질적으로 다른 순간들이 끊임없이 집적을 이루며 전개되는 총체화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듯이 오팔카는 그의 작업, 인생의 프로그램이라는 시-공간을 위해 무한대를 향해서 끊임없이 전개되는 수들을 써나가며 비가역적 단일체(unité irréversible)를 형성해 낸다. 둘 다 나뉠 수 없는 총체성을 지향한다.
4. 베르그송에게서 지속은 인생과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를 강조하고 있듯이 오팔카의 시공간 역시 시공간의 한계에 직면한 작가 자신의 생물학적 존재를 시각화하는 시간이다.
5. 베르그송의 지속이 종국에는 생물학적 영원성이라는 초시간성(intemporalité)을 강조하듯이 오팔카 역시 자신이 죽고 나서야 끝나는 〈인생의 프로그램〉을 통해 무한대를 지향하는 숫자쓰기를 계속하며 초시간성을 지향한다.
6. 베르그송이 시간의 본질인 지속을 탐구하기 위해서 ‘분석을 요구하는 지성’의 체계가 아닌 ‘직관’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듯이 오팔카 역시 ‘공간화된 시간의 분석’을 배제하고 인생에 의한 지속을 ‘직관’의 방법론으로 탐구해나간다.
7. 베르그송의 지속이 연속되는 새로움의 연쇄 고리로 이어지며 실제의 삶의 시간을 반영하듯이 지속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 단일체를 형성한다. 오팔카의 작업 역시 데타이의 각 형식적 특성들이 단일체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1965년의 1부터 계속 증가되는 새로운 수로 이어져 무한대를 향해 진행되는 수들의 ‘절대 불가분성’을 드러낸다.
8. 베르그송의 ‘개방적 도덕’은 직관을 통한 바라보기로부터 기인되면서 지성을 통한 분석하기로부터 기인하는 ‘폐쇄적 도덕’과 차별화된다. 오팔카의 작업태도 역시 규칙에 따른 엄격한 작업형식과 더불어 창작에의 고된 노동 등을 통해 윤리의식을 드러낸다. 그것은 지성이 아닌 직관과 내면적 의지로 가능해지는 ‘의지적 윤리’로 발현된다.
V. 작품 분석 : 오팔카의 유니테(Unité)와 베르그송의 불가분의 지속(Durée indivisible)
이제부터 오팔카의 작품 ‘인생의 프로그램〈 Le programme de vie, Opalka 1965/1-∞ 〉’에 나타난 시간의 시각화를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과 연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구체적인 분석의 첫장인 이번 V장은 앞장 마지막에서 언급했던 양자의 비교의 단초로 들었던 1, 2, 3항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내용들이다. 베르그송의 지속이 시공간의 완전한 합체라고 하는 현실계의 시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시간이 수량화, 측정화되거나 나뉠 수 없는 총체화된 흐름인 것에 근거하고 오팔카의 작업을 분석한다. 나아가 그의 작업 역시 전 인생의 시간이라는 현실계 시간의 기초위에서 지속되는 일체성의 시간을 형성화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무엇이 오팔카에게 있어 구체적으로 일체성, 단일성인가?
그의 인생의 프로그램은 ‘II장 묘사’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음의 세 가지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캔버스 숫자 그림, 사진, 그리고 여행카드가 그것이다. 이것을 본 연구자는 여행카드만 제외하고 오팔카나 다른 이들의 각기 다른 호명41)을 참조해서 다음처럼 작명해본다. 캔버스에 숫자를 세며 그리는 숫자그림을 〈Détail : Tableau-compté〉(데타이 : 숫자(수를 세는) 따블로), 자신의 얼굴을 찍은 사진을 〈Détail : Autoportrait photographique〉(데타이 : 사진으로 된 자화상), 그리고 ≪Détail : Carte de voyage≫(데타이 : 여행 카드)로 작명해보고 이후부터는 편의상 우리말로 〈숫자 따블로〉, 〈사진 자화상〉, 〈여행카드〉로 표기하기로 한다.
위의 세 가지 양식의 단일체인 〈인생의 프로그램〉은 또 다른 규칙들의 총합체, 단일체로 구성된다. 이러한 규칙들이 1965년에 한꺼번에 조성된 것은 아니고 1972년 오팔카 선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 만큼 1972년 이후의 내용42)으로 분석해본다.
우선 인생의 프로그램을 유지하는 거시적 윤곽의 규칙들이다.
1) 일(1)부터 무한대(∞)를 지향하며 증감하는 숫자를 쓰는 전개방식, 2) 숫자를 쓰면서 동시에 수를 소리 내어 읽고 그것을 녹음하는 방식, 3)하나의 〈숫자 따블로〉가 끝난 후 다음 따블로의 바탕색에 1%의 흰색을 첨가하는 방식, 4) 〈숫자 따블로〉 의 하루분량의 작업이 끝나고 난 후 작업 중인 작품 앞에서 찍는 〈사진 자화상〉 작업의 병행, 5)전시 디스플레이시에 모든 종류의 〈데타이〉를 함께 디스플레이하는 방식
여기에 오팔카가 준수하는 미시적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1) 〈숫자 따블로〉에 수를 쓸 때 고수하는 글쓰기의 방식, 즉 위, 좌로부터 아래, 우측으로 써내려가는 방식, 2) 숫자들 사이에 어떠한 공간적 간격이나 쉼표, 마침표와 같은 부호도 배제하는 방식, 3) 최소한 작은 크기로 숫자를 쓰되 읽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쓰는 방식, 4) 각 〈숫자 따블로〉마다 새로운 붓으로 바꿔 사용하는 작업하는 방식43)과 쓰고 난 붓을 숫자를 매겨 보관하는 방식, 5) 〈숫자 따블로〉를 걸 때 준수하는 일정한 간격(20cm 또는 23cm), 6) 각 데타이와 사용도구의 일정한 규격 (〈숫자 따블로〉는 196 × 135cm의 규격의 캔버스에 0호 크기의 로우니(Rowney) 붓을 사용하고 〈여행카드〉는 32.5 × 23.8cm의 규격의 흰 종이에 02호 크기의 펜촉을 사용한다. 한편 자화상 사진은 24 × 30.5cm의 규격의 인화지를 사용한다.), 7)〈자화상 사진〉을 촬영할 때 똑같은 상황과 복장을 하고 언제나 정면을 촬영하는 방식
우리가 살펴본 오팔카의 인생의 프로그램에 나타나는 세 가지 양식과 더불어 거시적 윤곽의 규칙이나 미시적 규칙들은 모두 엄격한 규칙으로 마련되고 준수되어 일관된 하나의 작품을 이루며 단일성(unité)을 지향한다. 세 가지 양식의 작품을 모두 〈데타이〉(détail)로 통일해서 호칭할 뿐만 아니라 이들 모두를 전시에 함께 모아서 보여주는 태도는 그의 작업이 단일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이다. 게다가 개별 양식인 각 데타이의 작품 각각에 제작된 날짜를 따로 기입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이 양식 모두를 하나의 제목인〈 인생의 프로그램, 오팔카 1965/1-무한대〉, 즉,〈 Le programme de vie, Opalka 1965/1-∞ 〉이라 부르는 것은 1965년에서 무한대로 질주하고 있는 단일의 시간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팔카의 인생의 프로그램에서 단일성을 부분적 요소로 나눈다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각각의 개별체가 단일한 일체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출발점인 숫자1은 매우 대표적인 예가 된다. 왜 0이 아니고 1인가? 오팔카는 0을 아무 것도 없음의 수로 보았고 1을 ‘시작이자 이미 전체인 수’44)로 ‘단일성의 기호(un signe de lunité)’45)로 파악했다. 오팔카의 숫자 1은 플라톤이 증거하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일자(一者)개념, 즉 ‘하나는 양의 차원에서 하나이자 복수이고 전체이자 부분이며 무한이며 유한’이라는 언급을 유추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팔카의 숫자 1이 품고 있는 단일성은 그의 첫 〈숫자 따블로〉인 〈 Detail 1-35327 〉가 품고 있는 단일성과 같은 맥락이다. 위의 철학에 빗대어 말해 본다면 숫자 1은 첫 〈숫자 따블로〉이자 모든 수이며 모든 따블로이자 ‘∞(무한대)’인 셈이다. 무한대를 향하는 수들의 집합을 예를 들면서 오팔카는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결코 분리를 시도하지 않는데, 그것은 쉼표도 마침표도 없는 문장과 같은 형식적으로 된 통합적인 형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 단일성으로서 내가 쓰는 숫자들 사이에서 일자의 의미를 생산해낸다.”46)
파르메니데스에 근거하여 볼 때 분리될 수 없는 존재가 곧 일자이자 유일자(唯一者)인 것처럼 오팔카의 〈인생의 프로그램〉은 단일성(unité)의 이름으로 일자의 개념을 지향하며 비분리를 앞세운다. 〈숫자 따블로〉, 〈자화상 사진〉, 〈여행 카드〉 등의 다양한 양식들은 물론이며 숫자 1부터 점층적으로 증가하는 수들이 집합되어 있는 오팔카의 〈인생의 프로그램〉은 개별적 요소들로 나누어지지 않는 통합체를 지향한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오팔카의 단일체가 ‘이질적 단일성(unité qualitativement hétérogène)’을 표방한다는 사실이다. 각기 형식적 특징이 다른 3양식의 〈데타이〉도 그러하지만 개별 〈데타이〉 속의 조형요소들도 모두 이질적이다. 〈숫자 따블로〉나 〈여행카드〉에서는 1-9까지의 숫자가 반복 증식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를 향하여 끝없이 증감하는 새로운 수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요소들은 늘 이질적인 변화를 지속해나간다.
그런데 우리는 오팔카가 개별의 이질성의 의미와 양상을 보다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취하는 ‘중성화(neutralisation)의 논리’를 다시 짚고 넘어가야만 하겠다. 본 연구자가 지칭한 세 가지 양식과 더불어 거시적 윤곽의 규칙이나 미시적 규칙들 모두가 오팔카가 정한 중성화의 논리로 운용됨으로써 그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적 이질성이 미세하게 도드라지며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성화의 논리’는 개별적 이질성들의 집합을 보다 더 가시화시켜 보여주는데 효과적이다. 이질적인 틀 안에서 드러나는 이질적 요소는 혼란스러움을 가중할 따름이지만 중성화의 규칙 논리 안에서 드러내는 이질적 요소는 보다 더 명징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그의 ‘사진 자화상’〈 Détail : Autoportrait photographique 〉을 예로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오팔카는 〈사진 자화상〉에 드러나는 자신의 얼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화하는 과정으로부터 기인하는 이질적 요소를 명징하게 드러내기 위해 조건과 상황을 ‘중성화’시켜낸다. 늘 동일한 종류의 하얀 와이셔츠47), 같은 목걸이, 동일한 상황의 조명은 물론이고 동일한 규격과 언제나 같은 정면 사진이 그것이다.
게다가 시간에 따라 자라나는 머리 역시 같은 길이를 고수하기 위해 항상 머리를 다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얼굴에 나타나는 시간의 흔적인 노화의 과정만 명징하게 드러내려고 그날그날 따라 달라지는 일상의 감정과 표정을 중성화시켜 내려는 태도는 가히 편집증적으로 드러난다. 슬픈 때이든지 기쁜 때이든지를 막론하고 매일같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정면을 응시한 채 특별한 표정 없는 중성화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런 작업 태도는 오팔카의 아버지가 사망한 어느 날 ‘〈사진 자화상〉을 중성화시켜 촬영하기에 어려웠음을 실토하는 그의 증언을 통해서 극대화되고 있다.
“나는 당시 무표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이 끔찍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 나를 통제해야만 했는데 슬픔에 복받치는 감정과 내내 싸워야만 했다.” 48)
오팔카의 〈인생의 프로그램〉에서는 중성화의 규칙 논리 안에서 개별 요소들이 그 나름의 색을 잃고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개별체들이 담고 있는 이질성의 요소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가 천천히 늘어간다던가, 바탕색이 서서히 밝아진다던가, 사진 속의 인물이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노화의 과정을 거친다던가 하는 식으로 미세하게 드러나면서도 점점 더 그 본질은 명징해지는 것이다. 그 본질이란 지속이 작용시키는 ‘이질적 단일성(unité qulalitativement hétérogène)’이며 한편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그것에 순화되면서 변모하는 인간 주체의 모습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단일성을 이루는 개별 요소들을 따로 분리하거나 그의 인생의 프로그램을 단편적으로 나눈다는 것은 무의미할 따름이다. 오팔카에게 있어 이질적 단일성은 ‘불가분적(不可分的) 지속(Dureé indivisible)’을 지향한다.
오팔카의 이질적 단일성이 나뉠 수 없는 불가분성을 가진다면 베르그송의 ‘불가분의 지속(Durée indivisible)’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우리는 앞에서 지속이 ‘공간화하지 않은 시간’임을 비교적 자세히 살펴보고 이 지속을 사유하는 도구로서의 ‘직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또한 베르그송에게서 이러한 특성이 유도하는 단일성의 차원을 지속의 개요를 다루는 곳에서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이질적인 새로움을 끝없이 창출하고 변화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삶의 약동(elan vital)’이라는 개념을 주요하게 다룰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삶의 지속(durée de la vie)’이 드러내는 ‘삶의 약동’을 통해서 불가분의 지속과 단일성을 연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기계론이든, 목적론이든 생기론이든 당시의 진화론은 모든 생명의 본질을 단순히 기계론적인 틀 속에서 고정된 모습으로 이해하였을 뿐이라고 비판한다.49) 앞서 살펴보았듯이 과학적 추론을 일삼는 지성에 의해서는 대상이 분석되어질 수 있지만 대상의 본질을 드러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속을 통해 존재하는 생명이란 어떠한가? 그의 견해 식으로 말하면 지성은 ‘진화’를 측정가능한 단계들을 거쳐 상향하는 단일하고 점진적인 경향이라고 기술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베르그송으로서는 ‘지속처럼 삶과 생명이라는 것은 지성이 분석, 감당할 수 없는 늘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무엇’50)이었다. 따라서 이 삶의 과정은 앞서의 주장처럼 직관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된다. 그는 진화론의 분석적 방법론을 이으면서도 직관에 의해 이 진화론의 방식을 극복하는 ‘창조적 진화(évolution créatrice)’를 제창한다. 창조적 진화에는 ‘삶의 약동(élan vital)’이 근원이 된다. 이 ‘삶의 약동’이란 진화의 선들로 분할되면서도 애초의 힘을 지니며, 적어도 규칙적으로 유전되고, 스스로 축적되어서 신종을 창조하는 변이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삶의 약동은 모든 사물의 동기가 되며, 그것은 곧 근본적인 실재이다.
우리는 여기서 생명, 삶의 양상이 영혼과 몸이 한 덩어리인 채로 인식되는 ‘생명의 단일성(unité de la vie)’51)이나 지속하는 자아가 지니는 ‘연속적 유동성(fludité successive)’ 그리고 이러한 연속적 유동성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예를 든 ‘멜로디(mélodie)’52)의 개념이 동일하게 베르그송의 불가분의 지속을 언급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멜로디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살피고 있다.
“지속은 불가분의 멜로디의 연속성으로, 과거가 현재 안으로 들어와 불가분의 전체를 형성한다. 이 전체는 매번 추가되는 새로움으로 인해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53)
위의 고찰처럼, 오팔카에게 있어 이질적 단일성이 불가분적 지속(Dureé indivisible)을 지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의 불가분적 지속의 철학은 직관을 통해 시간의 공간화를 거부하는 가운데 생성되는 이질적 단일성 외에도 연속적 유동체인 생명의 약동이 유발하는 새로움이라는 연유로부터 근거한다 할 것이다.
VI. 작가 분석 : 오팔카의 의지적 윤리(éthos volontaire)와 베르그송의 개방적 도덕(morale ouverte)
오팔카의 작품 세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작가주의적 인식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본 연구자는 ‘의지적 윤리’를 꼽아본다. 이 ‘의지적 윤리’라는 용어는 본 연구자가 베르그송의 도덕과 관련한 철학에서 언급되는 ‘의지’를 빌려와 ‘윤리’와 섞은 합성어지만 본인의 견해로는 오팔카의 작가주의를 잘 설명해주는 용어가 되는 것으로 판단해 본다. 외견상 오팔카의 윤리적 태도는 자신이 만든 창작에의 그 무수한 규칙들로 인해 매우 금욕적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고단한 신체적 고행이 동반되어 피학(被虐)적이기 조차 해 보이는데 이와 같은 태도를 의지적 윤리로 조명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를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또한 그것이 지니고 있는 베르그송의 도덕 개념과의 관계성 그리고 나아가 ‘지속의 철학’과의 상관성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둘 다 특별한 상이점이 없는 유사한 개념임에도 베르그송의 도덕과 차별화해서 오팔카로부터 윤리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고찰하고자 하는 것은 윤리가 도덕에 비해 규범성과 구체성이 비교적 강하다는 차원을 반영한 것이다. 더불어 윤리(éthique)라는 용어가 기원하고 있는 같은 의미의 에토스(éthos)라는 용어를 적극 사용한 이유는 그것이 동일한 방향성과 지속적 특성이 강조될 뿐 아니라 예술작품의 도덕적 기품과 같은 미학적 용어로 사용된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오팔카의 작가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리(éthique)나 도덕(morale)보다 더 적절한 것으로 판단한 탓이다.
자, 그러면 오팔카가 시작했던 1965년의 첫 〈숫자 따블로〉인 〈 Detail : 1-35327 〉 작업으로 되돌아가 작가가 당시 심각하게 빠져있던 고민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그 고민이란 무엇일까? 오팔카는 숫자 1부터 쓰기 시작해서 무한대에 이르는 수를 써내려가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첫 〈숫자 따블로〉 작업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어떠한 쉼표도, 간격도 없이 숫자들을 계속 붙여서 써내려가는 방식을 시도하면서 앞 뒤 숫자를 그 자신도 구분하기 힘들어지는 순간들을 자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숫자를 쓰는 동안 간격이 없이 붙어있는 숫자들 때문에 이미 써 놓은 수를 다시 써놓거나 건너뛰게 되는 실수(erreur)의 상황들이 빈번하게 연출된 것이다. 예를 들면 실제로 27233 다음에 써야 할 숫자가 27234인데도 불구하고 27238을 실수로 쓰기 시작해 그 수를 계속 이어 진행하거나 27968 27969 다음에 27970을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27911을 써 넣은 엉뚱한 실수는 본 연구자가 첫 숫자 따블로에 나타난 숫자를 꼼꼼히 읽어가면서 찾아낸 것들이다. 이러한 실수들은 망각이나 집중력 상실 등의 이유를 유추해볼 뿐, 특별하게 다른 이유를 추론해보기에는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실수의 원인을 명확히 추적해볼 수 있는 지점도 존재하는데 이를 찾아본다는 것은 그의 작품을 분석하는데 있어 무척 흥미로운 지점이다. 본 연구자는 오팔카의 작품이 복사된 사진 이미지 위에 형광펜을 칠해가며 오팔카의 실수들을 찾아냈는데 그 실수의 원인을 나름대로 추적해 보았다. 아래의 일련의 숫자는 그 예 중 하나이다. 논의의 편의상 띄어 써 놓기로 한다.
‘...29153 29154 29155 156 29151 29158 29159 2916 29161...’
29155다음에 써야 할 숫자가 29156임에도 오팔카는 붙여 쓰는 작업방식으로 인해 전체 수를 읽지 못하고 뒤의 수 155만 인식한 채 156이라는 엉뚱한 숫자를 써 놓았다. 망각이나 집중 상실 탓이다. 이내 오팔카는 자신의 실수를 발견하고 29157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29157을 쓰면서 7자를 급하게 쓴 탓인지 7과 1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하게 써 버리고 말았다. 눈으로 보기에 숫자는 29151라는 형태가 확연하다.
또 한 예이다.
‘...28170 28171 28172 28178 28179 28180...’
28172 다음에 28173을 써야만 했던 오팔카는 28173을 손에 힘이 빠졌는지 마치 28178처럼 써 놓고 말았다. 그래서 다음 번 숫자를 28174를 써야 함에도 실수로 28179를 이어서 써 내려갔던 것이다.
이런 예에서 살필 수 있듯이 숫자 ‘1과 7’, ‘3과 8’, ‘0과 6’ 사이를 제대로 구별, 인식하지 못하고 숫자를 잘 못 써내려간 사실은 그 외에도 더 찾아볼 수 있다. 2만 단위의 수에서도 이러한 실수가 발생되는데 숫자가 더 증가되는 단계에서는 실수가 더 늘어나게 되고 그 양상도 다양하리라고 우리로 하여금 예측하게 한다. 그의 실수는 숫자 인식의 잘못으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오팔카의 망각, 집중력 상실 등의 여러 가지 이유들로 다시 쓰기, 건너뛰기 등의 실수가 초래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 갖는 부분은 이러한 실수의 양상이 아니라 그 실수를 발견한 오팔카의 태도를 살펴보는 일이다. 오팔카는 작업 중에 규칙적으로 수를 써내려가는 관습이나 자신의 의식 속에서 실수의 가능성을 감지할 때나 우연히 그 실수를 발견하게 될 때는 당장 쓰기의 작업을 마친다. 그리고 그 첫 실수와 그 실수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천천히 다시 수를 읽어간다. 실수의 근원이 되는 처음 수를 발견하고 나서 오팔카는 ‘그 실수를 하기 전의 수를 취하고 그 다음의 수를 계속 써내려가야 할 공간으로 와서 다시 쓰기 시작한다.’54) 왜 실수해서 틀린 수를 지워버리지 않고 틀리기 전의 수를 취해 다시 그 다음 수부터 써나가는 것일까? 오팔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실수를 대면하는 위와 같은 태도를 설명한다.
“비가역성 규칙은 나로 하여금 내가 이미 흔적을 남긴 과정을 지워버리거나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결정은 단일성으로부터 출발하는 비가역적 시간의 이마쥬(image)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실행해가는 수적 전개의 논리 속에서 그 실수의 존재 이유를 끌어낸다.”55)
위와 같은 설명은 비가역적인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실수를 과거의 흔적 속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비가역적인 시간을 계속 진행해 나가려는 오팔카의 ‘시간을 대면한 작가의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흔적을 남겨두면서 그 실수를 기꺼이 용납하는 오팔카의 태도가 매우 윤리적임을 생각해볼 일이다. 실수에 대한 인정은 거스를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인정이자 현재에 대한 지속적인 인식이다.
우리는 또한 오팔카의 시간성을 탐구하기 위한 그의 모든 작업 형식(mise en oeuvres)에 대한 결정 자체를 윤리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56) 시간을 대면하는 한 작가 주체가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자신에게 투여된 시간의 의미를 탐구해 나가기로 결정한 1965년 이래 구축되어간 작업 형식에 대한 결정과 과도한 집착은 윤리적임을 지향한다.
〈숫자 따블로〉 작업시 줄곧 서서 작업하기를 고수하는 태도는 첫 따블로 작업 뒤에 병원에 입원했을 만큼 무모하게 진행되었음에도 현재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고, 하나의 〈숫자 따블로〉 작업 뒤에 이어지는 따블로에 필히 약 1%의 흰색을 첨가하는 작업 방식이나 새로운 〈숫자 따블로〉를 작업할 때 필히 새로운 붓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방식도 작업형식에 대한 윤리적 결정에 따른 것이다. 1992년에 〈숫자 따블로〉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서 비록 그만 두었지만 그 전까지는 여행을 떠날 시에 지속적인 시간에 대한 작업을 위해 〈여행카드〉를 고안했던 일이나 여행카드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던 〈숫자 따블로〉를 필히 끝내야만 하는 엄격성의 태도는 윤리적인 태도에 다름 아니다.
그 뿐인가? 〈사진 자화상〉을 찍기 위해 늘 고수하는 같은 와이셔츠나 목걸이, 같은 머리길이,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중성화된 표정의 〈사진 자화상〉을 위해 극도의 슬픔의 표정과 싸워야 했던 태도는 차라리 극단적인 금욕을 수행하는 윤리의 차원에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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