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평론일반〕
문화목회와 미술의 만남
고흐 이후의 현대미술과 문화목회의 지평
김성호(미술평론가)
프롤로그
문화목회와 미술의 만남을 테마로 한 이번 강의에서 고흐라는 화가는 하나의 화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한편으로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세잔과 더불어 오늘날 현대미술의 문을 열었던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당대에 복음주의 목회와 화가로서의 삶 사이에서 번민했던 신앙인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고흐의 예술세계를 출발로 해서 그가 현대미술에 끼친 긍정적, 부정적 영향들을 살펴보면서 현대미술의 다양한 얼굴들을 이해하는데 집중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고흐는 이 강의를 여는 출발지점일 뿐 강의의 핵심은 아닙니다. 이 강의는 고흐의 영향 아래 촉발된 현대미술이 문화목회의 현장을 위협하는 태도를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고흐 이래로 촉발된 ‘표현주의’ 열망은 현대예술의 모든 장에서 종교의 위치를 위태롭게 하는 날것의 예술들을 만들어내기에 이릅니다. 신성모독적인 태도를 표방하고, 반기독교적 가치관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반윤리적 가치관마저 예술이란 이름 아래 용인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가, 예술품들이 오늘날 문화목회의 현장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요?
이러한 이해들을 거쳐서 우리는 고흐와 전혀 다른 듯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로만 오팔카라고 하는 한명의 또 다른 현대미술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고흐가 기독교의 복음주의적 신념의 실천에 대해 골몰했었던 것과 같이, 오팔카는 범종교적 신념의 실천에 골몰했던 작가입니다.
저는 이 두 작가의 예술세계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다른 방향에서 실천한 작가로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예술 자체의 본성을 가장 인간적인 욕망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그간의 많은 이론가들의 견해들을 따르는데 있습니다. 혹자는 그것으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지향하기도 하고 혹자는 인간 자체의 문제로 귀속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양자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각기 다른 방향의 예술세계에서 궁극적으로는 같은 방향성을 지향하는 두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작은 피조물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구도자적인 자세로 실천해가고자 했던 두 작가의 모습을 겹쳐봄으로써 예술을 매개로 한 문화목회의 한 방향성이 그려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I. 강의 구성
강의의 뼈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에서 기획되었습니다.
첫째, 이 강의는 작가에 관한 연구인 이른바 ‘작가(론) 연구’로 출발했습니다.
작가론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되풀이하는 작품론에 대한 심화과정 체제의 연구가 될 것입니다. 미술에 대한 이해가 주로 작품에 대한 이해로 집중되어 우리의 관성에 비추어 볼 때, 작가 당대의 시대, 정치, 문화적 배경을 아우르며 그 속에서 작품을 생산해 온 작가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도모한다는 것은 분명코 미술에 대한 총체적 인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할 것입니다. 특히 작품에 대한 주제와 형식을 설명하기에는 수월할 수 있지만 작품을 생산한 작가주체를 설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작품론이란 실제 작품을 미술이라는 커다란 덩치 안에서 미적 태도와 감상과 관련된 하나의 경향이나 양상으로 소개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와 무궁무진한 해석의 자유로움을 부여할 수 있지만 작가론의 경우는 구체적 정보 제공을 간과해서는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부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고흐의 경우에, 우리가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론에 집중하게 된다면 작품에 나타난 재료와 표현기법, 미적 형식, 미적 대상에 대한 관찰과 같은 ‘보편적 차원의 미학적 논의’가 필요하지만 고흐라는 ‘작가론’에 집중하게 된다면 인상주의라는 당대의 흐름을 견인했던 이 작품의 시대적 상황과 그 속에서 시발된 작가의식의 반영과 같은 진술, 즉 역사 속의 창작주체라고 하는 ‘구체적 차원의 미술사적 진술’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작품에 대한 도상학적 분석이나 작품 해설이 아닌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던 당시의 화풍과 시대적 배경은 물론이며 고흐가 처했던 당시의 기독교적 신앙관, 심리적,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일이 무엇보다 주요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론은 작품론에서 오독될 수 있는 해석의 자유로부터 조금은 객관적 진술을 할 수 있는 방법론이 될 것입니다.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둘째, 이 강의는 예술사회학이란 관점을 취합니다.
이런 관점은 예술가가 생존하고 있던 사회의 반영이 곧 그들의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특히 고흐 이후 진행되었던 성상모독적, 반기독교적, 반윤리적 예술세계에서 당시의 사회문화현상의 조짐들을 읽어내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사회비판적이고 계도적인 예술이 있는가 하면 그것과 정반대의 예술 또한 팽배해있습니다. 미적 가치의 변모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예술들을 문화목회의 차원에서는 그저 논의의 대상으로 마냥 밀쳐둘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오늘날에는 이러한 자유로운 표현의지에 기반한 예술유형들을 예술의 본질로 평가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순수예술의지의 발현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대예술과 기독교는 영원히 하나의 범주 안에 포섭될 수 없는 것일까요? 포섭될 수 없다고 할 때 기독교의 문화목회는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까요?
셋째, 이 강의는 비교미술사, 비교미학이란 관점을 취합니다.
상기한 고흐, 로만 오팔카 두 작가는 모두 미술사에서 독창성의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들입니다. 독창성이란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차별화되는 지점일 텐데 그것은 ‘새로운 것’에 다름 아닙니다. 회화로부터 재현의 고유 기능을 빼앗아 버린 사진이 등장한 이후 인상파 화가들은 죽음 앞에 당도한 회화의 탈출구를 마련하면서 회화의 본질적 가능성에 더 고민했던 것처럼 이후의 작가들도 세상을 보는 예술의 눈을 이전의 없던 새로움으로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이러한 새로움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미술사적 흐름 속에서 당면하게 부상했던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들이 이러한 새로움을 싹트게 하는 거름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들 작가들은 그 거름을 남들보다 빨리 흡수하고 구습의 전통 속에서 예술의 또 다른 가능성 등에 대해서 골몰했던 작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교미술사나 비교미학이란 양자를 비교분석한다는 관점이기 보다는 기존의 해석을 따르며 연구대상을 비교하는 관점이기 보다는 전혀 다른 관점의 해석주체를 등장시키는 일입니다. 일테면 서구적 시각으로부터 동양적 시각으로 살펴보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문화목회라는 해석주체를 등장시켜 두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새로이 보는 작업을 할 것입니다. 이 두 작가의 작업을 기조로, 또 다른 작가들의 다른 작업들도 함께 같이 살펴보면서, 문화목회의 여러 가능성의 길들을 검토해보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그것은 이번 강의의 소기의 성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II. 고흐
고흐(Vincent Van Gogh,1853- 1890)는 후기인상주의로 대별되는 작가이면서 오늘의 현대미술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하고 있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정열적이고도 비극적으로 살다간 그의 삶에 대한 관심이 지극했지요. 평생 무명의 화가로 살면서 열정적으로 작품세계에 몰입했던 창작활동, 친구 고갱과의 성격 충돌로 자신의 귀를 잘라낸 에피소드,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을 감당해 온 동생 테오에게 700여통의 편지를 보내며 보여준 끈끈한 가족애, 마지막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생애와 같은 개인소사는 이미 하나의 고전이 된지 오래입니다. 덧붙여 사후 그가 짧은 생애동안 남긴 800여점의 유화와 그에 버금하는 드로잉 등 많은 양의 작업들이 한 결처럼 칭송을 받는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단 두 점만을 팔았을 뿐이라는 슬픈 에피소드나 이와 대비되게 사후에야 고흐의 작품이 경매 최고가를 여러 번 갈아치웠다는 미술시장의 이야기들은 많은 대중들이 자주 언급하는 내용들입니다. 고흐는 언제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화가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고흐를 이야기하는 많은 이들이 늘 도달하게 되는 ‘고호의 생전의 비참과 사후의 영예’에 대한 진술은 언제나 그 의미의 진정성으로 인해서 우리로 하여금 숙엄하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독교들인에게 고흐는 하나님의 목회 사역을 감당하고자 했던 ‘기독교 예술가’로 이해됩니다. 혹자는 그를 진정한 기독인으로, 혹자는 그를 신앙을 저버린 피폐한 불신자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작고하기 전까지 변화된 고흐의 예술세계를 살피면서 기독교 신앙을 버린 예술가가 아니라 그것을 자신에게 체화된 복음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을 끝까지 지닌 예술가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주지하듯이, 이러한 세계관은 그가 처했던 가족과 사회적 상황의 문제들로부터 형성된 것이지요.
고흐는 네덜란드 북부 벨기에와의 국경 지대인 라반트의 그로트 춘데르트(Groot Zundert)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흐의 할아버지는 라이덴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습니다. 고흐의 아버지 역시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신학 학위를 취득하고 목회를 했던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요? 그는 종교와 미술 모두에 가까운 가정환경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그의 삼촌 셋은 화상이었습니다. 16세 때부터 헤이그와 런던에서 잠깐 동안 화상일을 도와주며 그림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지만 고흐는 1876년 종교적 정열에 불타 교회 사역으로 진로를 바꾸게 됩니다. 그런 계기는 그의 아버지로부터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특히 복음주의 신앙관에 기초한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진보적인 신학사상에 심취한 목회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고흐는 아버지와 달리 복음주의적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대립할 수 없는 갈등을 형성하게 되지요. 고흐가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다른 신앙관이었습니다. 고흐는 그의 숙부인 스트리커 목사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실천하는 윤리적이고도 복음주의적인 사상에 깊이 심취해 있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평민 출신으로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거치지 않은 채 목회를 했던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저작 ‘천로역정’에 나타난 복음주의 선교관에 고흐는 깊이 감화를 받았지요.
그런데 고흐의 신학과 목회의 길은 험난했습니다. 신학교육 보다 그것의 실천적 삶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 탓에 고흐는 전문적인 신학교육 대신 평신도 선교사를 선택하게 됩니다. 단기 목사 양성소를 거쳐 평신도 선교사가 되어 한 때는 벨기에의 보리나즈(Borinage) 탄광촌을 무대로 정열적인 전도에 몰두하였지요.
그러나 이것도 잠시 벨기에 복음주의 연합은 고흐의 선교사 직분을 박탈합니다. 이유인즉슨, 극단적인 기독교적 열정에 따른 무리한 복음 실천과 어눌한 설교 자체가 선교사 직분을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에 불복한 그는 홀로 선교활동을 펼쳐보지만 생계의 문제와 극도의 교권주의에 대한 반발심으로 1879년 이래 목회의 사역을 접게 됩니다.
게다가 1881년부터는 복음주의적 신앙에도 어느정도 회의하면서 기독교로부터 등을 돌리는 전환을 보여줍니다. 그는 결국 예술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화가의 길을 접어든 때가 그의 나이 27세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열정적인 창작활동에 매진해 가지만 그는 그로부터 10년밖에 살지 못하고 맙니다.
화가로서의 초창기 시절인 5년간은 네덜란드에서 육체적 고난과 끊임없는 신경과민에 시달리면서 주로 농부, 노동자. 풍경 등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색조는 어두움 그 자체였고 가난의 냄새가 절절하게 배어있는 육질의 그 무엇이었습니다. 1885년 그의 걸작〈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의 정점을 이루는 작품입니다. 작품은 칙칙하고 어두운 불빛 속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거친 민중의 삶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의 작품들 역시 빼놓을 수 없겠지요. 〈시가를 들고 있는 시엔(1882)〉이나 〈뜨개질하는 여인과 소녀(1883)〉그리고 〈슬픔(1883)〉 등은 이러한 민중에 대한 연민이 잘 드러난 작품들입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고흐의 이전의 기독교적 신앙과 연결 짓는 것은 어느 정도 무리인 듯합니다. 이미 교권주의와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좌절이 깊이 각인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인간 그리스도의 삶의 실천과 같은 인간주의에 보다 관심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흐,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
그러기에 그의 작품 〈씨뿌리는 사람〉이나 〈밀밭〉에 나타난 이미지를 성경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밀알 비유(요한복음 12장 24-25절)나 씨뿌리는 비유(누가복음 8장)와 같은 성경에 대한 재해석이란 관점으로 확대해석하기에는 무리수가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당시 농촌에 살고 있던 고흐의 상황에서는 늘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의 소재이자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가 자살하기 전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더더욱 성경의 비유를 표현한 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파리로 거처를 옮겨 고단한 삶을 이어가다가 지치고 피곤한 영혼을 이끌고 다시 ‘오베르 쉬르 오아즈’라는 농촌으로 내려왔던 그의 비틀린 정신병적 최후의 심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1890
그러나 우리는 고흐에게 있어 종교적 신념의 전후의 이 시기를 반기독교적 세계관 혹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무관심한 시기였다고 단정하지는 못합니다. 그에게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복음주의적 세계관이 작품을 통해서 발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1884년 일련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순례자적 이미지나 고흐의 편지에서 발견되는 작가적 진술을 보아도 이러한 관점은 유의미합니다. 고흐가 르낭의 저서에서 나타난 참된 기독교관으로부터 자신의 작품에 나타난 올리브 나무를 연관 짓고 있다든가,〈별이 빛나는 밤 (1889)〉에서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종교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관점들에 주목하게 합니다. 특히 생 레미 정신병원 시절 그린 종교적 도상들인 〈피에타〉, 〈선한 사마리아〉 〈영원의 문에서 (1882, 1890)〉 등에 나타난 작품들도 이러한 정신세계 근원에 내재한 종교적 신념을 다분히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 1890
그러나 이러한 화제들이 작품화되었다고 해서 그의 작품관을 기독교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론을 내기에는 무수히 다른 논의거리를 생성시킨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논의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종교적 신념의 전후에서 작업했던 작품들 이후의 작품들에게로 집중해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고흐는 1886년 2월 파리에서 화상으로서의 기반을 잡고 있던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파리에 도착하고 코르몽 화실에 출입하면서 툴루즈-로트렉. 피사로, 드가, 쇠라, 시냑, 고갱 등의 인상파 화가들과 친교를 맺기 시작합니다. 이 무렵, 어두웠던 그의 작품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점묘풍의 밝은 화면으로 급속히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1888년 2월 남프랑스의 아를르로 이주하고 나서는 독자적인 화픙을 점차 확립해나갑니다. 이 무렵 제작된 명작으로 〈해바라기〉가 유명합니다. 남부의 따스한 기후와 햇볕을 받아 빛나는 색채가 강인한 힘을 전해줍니다.
그는 아를르에서 지역사회와 연결되는 일종의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게 되는데 그 동조자로 고갱이 그의 삶에 개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견해와 작풍이 정반대였던 두 사람은 결국 잦은 성격 충돌로 인해 공동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둘의 이별과 파탄을 결정짓는 사건이 바로 자신의 귀를 잘라내는 고흐의 행동이었던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1889년 5월 그는 자진해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요양생활을 하면서도 작품제작에 대한 의욕에 불타 그 다음 해에 그곳에서 거의 미친 듯이 150점에 이르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게 됩니다.
1890년 5월, 생 레미를 퇴원한 고흐는 파리교외의 ‘오베르 쉬르 오아즈’로 옮겨서 의사 폴 가세(Pqul Gqchet)의 환자이자 손님으로 도움을 받고 지내던 중 그 해 7월 29일 그의 나이 37세 때 절망의 극에 달해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맙니다. 물론 이 마지막 에피소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증빙할 자료가 그다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고흐, 오베르의 교회, 1890
다만 우리는 그가 살아온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간극에서 그의 예술세계를 기독교적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데 이르게 됩니다. 그의 예술세계에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세계관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편집증적이거나 정신병적 강박증적 면모도 살피게 됩니다. 또한 현대미술의 장에 들어서면서 어떻게 회화를 현대적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일련의 고민들에 온통 빠져 있던 그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세속적 성공을 폄하하면서도 그가 끝까지 그러한 세속적 성공을 갈망하고 있던 이중적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무명화가였지만, 그가 후세에 미친 영향은 그 후 25년간 유럽과 미국에서 잇달아 열린 전시를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인상파로 출발해서 자신의 독자적 화풍을 펼친 고흐의 작품이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에 끼친 영향력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지요. 한편, 미술사의 영향력 보다는 비극적인 그의 전기에 공감하는 오늘날의 대다수 사람들은 고흐를 낭만주의 예술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를 비참하게 살다간 불행한 화가 그러나 천재화가로 자리매김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내밀한 작가의식의 열정적이고 진솔한 표현에 우리 모두가 감동을 받고 마는 탓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전기적 삶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예술이 기독교적 신앙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단정이나 탈기독교적 관심이나 정신병적 측면에서 발현되었다는 의도적인 연결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에서 현실과 종교적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던 평생의 주제였다는 것이 보다 주요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환영처럼 어른거리며 작품세계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III. 고흐 이후의 현대미술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고흐 이후의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표현주의’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감정표출의 예술’입니다. 그것은 예술가 주체의 내부 생명, 내적 흥분, 직접적이고 자발적인 감성의 자율성과 그것의 표현을 극대화하면서, 강렬한 색채, 왜곡된 형식, 역동적 화면 등을 생산합니다.
물론 표현주의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20세기 초반의 인상주의 회화로부터 반기를 드는 운동을 지칭하고 있지만, 그 근원적 정신에는 후기인상주의의 고흐를 위시로 한 일련의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 선두에 바로 고흐가 있습니다. 그의 예술의 영향을 다분히 표현주의라는 용어로 집중됩니다. 즉 이성적이고 절제된 화면 구성과 같은 조형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작품을 창작하는 미술가의 내면으로부터 길어오르는 통제되지 않은 주관적 표현의지입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특히 독일의 브뤼케와 같은 프랑스의 포비슴과 같은 표현주의 운동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화된 컨템퍼러리아트를 여는 주요한 밑거름이 되는 예술정신입니다. 프랑스의 앵포르멜이나 미국형 회화의 시작이라고 평가받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그와 같은 정신을 계승하는 현대미술 운동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의 일환에는 다양한 관점들이 내포되어 있지만 문화목회의 차원에서 거론되어야 할 내용이 바로 인간의 자율적이고 주관적인 감성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는 표현주의의 후신인 독일 신표현주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포스트모던 아트 들이 예술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고민하다 보니 성상모독, 반종교적 가치 등을 스스럼없이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테면 다원성을 기치로 한 가학적 동성애, 신체적 예술의 극한 실험 등 오늘날 현대적 위기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지하듯이 도덕으로부터의 일탈, 노동으로부터의 쾌락,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는 해방은 또 하나의 억압을 가져옵니다. 모더니즘에서 해방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로부터 ‘상대’를 부르짖었지만 ‘정체성 위기’와 ‘주체 파기’라는 함정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주관의 해방은 또 다른 억압의 순환구조를 생산해냅니다. 어찌 보면 미술은 시대의 불안한 현상학적 조짐을 읽어내면서도 처방에 있어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물론 미술에 있어서 어떠한 종류의 권위나 인위적 제한도 예술의 굴레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작가의 고유한 자유로운 의지가 발현될 때 가장 힘 있고 위대한 예술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형식미학의 자기비판적인 미술사에서 간과되고 별리되었던 주변의 삶과 환경에 처한 타자와 차별성, 개인의 정체성, 인종, 성별의 문제를, 테마로 풀어가는 오늘날 표현주의적 현대미술은 건강한 요소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화적 성을 전략으로 삼는 작가에게는 직접적인 저항보다는 신체를 통한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거나 특유의 여성 감수성을 남성과 대비하여 상징적으로 고발하려는 양태로 나타나며, 민족, 인종의 신체테마 또한 백색주의에 의해 개인에게 가해지는 편견을 고발, 그 차이를 강조하는 회화적 발언을 통하여 나타나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잭슨 폴록의 작업 광경 질 바리에, 정신적 풍경, 2004

오를랑, 성형수술 퍼포먼스, 1993 마크 퀸, self, 1991
그런데 ‘차별’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을 작금에 보이고 있으나 그 표현방법으로 사용한 현대미술의 언어들은 충격적 효과를 노리는 전략들이 대부분입니다. 신체는 헐어있고 금기의 윤리를 넘어 이성이 작용하는 주체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구체적인 미술의 예들은 강의시간에 직접 이미지를 통해서 확인하고 검토하도록 하겠지만, 여하튼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표현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습니다.
이런 지점에서 문화목회가 표현주의적 전통을 여전히 계승하고 있는 현대미술을 포함해서 현대예술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만 할까요? 표현주의가 야기한 현대미술 앞에서 문화목회의 과제는 과연 무엇인가요? 그것은 본 강의자가 던지는 하나의 화두가 될 것입니다.
(2편에서 계속 : http://www.daljin.com/column/9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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