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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전쟁과 플래카드

이선영

선거철도 아닌데 거리마다 가득 걸려있던 정당 정책 광고 현수막이 보행자에게 불편을 줄 수 있음이 지적돼서 규제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다. 길목 좋은 곳에 치렁치렁 매달린 정당 현수막들은 보행자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시야를 차단한다. 대부분 긴급하지 않은, ‘XX동맹 강화’ 같은 정책 광고다. 국회나 정당, 법원 등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이 규칙대로 하면 될 사안이 거리 선전전으로까지 나와서 민폐다. 이미 마이크 쥔 이들도 끝없이 광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온 것인가. 전 국민이 하루 종일 바라보는 스마트폰을 비롯해 정책과 성과를 알릴 통로가 많음에도, 현수막까지 동원할 정도로 대립정치가 심화되었음을 알리는 기표다. 이념의 경쟁을 넘어서 이제 전쟁까지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지난해 세계 군비 지출이 3.7% 증가된 것은 사상 최대치’(세계일보, 4월 24일)라는 통계는 냉전 시대의 회귀를 알려준다. 전쟁으로 치닫는 체제 또는 이념적 경쟁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뿐 아니라, 다양성의 깃발인 예술을 퇴색시킨다. 정치에 관한 한, 과도한 대립은 우리 국민만 놓고 보면 이유가 확실치 않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주변 강대국의 길항작용과 그에 따른 이해관계가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탓이며, 지난 몇 년간 정권의 부침이 대립각을 심화시켰고, 이것이 현수막의 범람을 야기했을 것이다.



White Mountain, November, 1620. 출처:위키백과
바이센베르크 전투도. 유럽에서 신/구교 간에 수십년 간 벌어진 전쟁 기록화에 등장하는 ‘플래카드’


현수막에 담긴 내용은 한 현상을 두고도 아전인수격인 정략적인 대응이 가득하며, 정치를 흑백논리로 물들인다. 다른 현수막은 불법이고 정당에서 내건 것은 합법이다. 권력의 독점이다. 이 현수막들은 법이 흔들림 없는 보편적 기조가 아니라, 자의성임을 실감나게 한다. 대선 후 1년을 되돌아보며 쏟아진 많은 5월 기사 중 경향신문 5월 6일 기사는 사단법인 생활정치연구소의 토론회를 전했다. 이 토론회에서 안병진 교수는 ‘한국정치사에 최초로 등장한 검찰통치의 정치 질서’를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법을 활용한 지배(rule by law)’라고 평가했다. 대다수 ‘선량한’ 사람에게 법은 특별하지 않다. 건강한 이에게 병원의 존재처럼 말이다.

하지만 법을 지킬 수 없거나 고의로 위반하는 사람에게 법은 자신의 운명을 가늠하는 민감한 경계다. 어디까지가 합법인지는 법원 판단이라는 최종심급이 있지만, 유례없는 사건의 경우 이를 계기로 새로운 입법이 추진되곤 한다. 최초의 법이 힘으로부터 생긴 것이고 법의 변화 또한 힘에 의한 것이라는 철학자들의 생각이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가령 북미와 남미에 도착한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에게 관철한 정복자의 법이 그렇다. 법의 시초에 힘이 있었고, 태생적 특성은 변치 않는다. 그래서 이미 권력을 가진 자가 법만 외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법과 관련해 소비가 가장 많은 분야는 정치와 경제다. 법의 오용과 남용으로 보일만큼 고소고발 사건이 많다.

서민이나 개미투자자를 울리는 전세 사기나 주가조작 같은 사건은 합법적인 범주 내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범죄였다. 예술도 자체의 규칙과 그 위반을 통해 양식이 변화한다. 예술에서의 규칙은 지배가 아닌 소통을 위한 것이다. 당대의 규칙은 시대양식을 낳았으며 사람들은 상징적 우주를 공유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시대와 양식은 그 주기가 더 빨라졌고 무엇이 정(正)이고 반(反)이고 합(合)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위반마저 찻잔 내 폭풍같은 에피소드로 남는다. 사건은 그저 담론적으로 소비되는 항목에 지나지 않을까. 하지만 예술에 대한 제도론적 미학이 자리를 잡은 이래, 미술 내부에서의 금기와 위반의 역사 또한 중요해졌다. 네트워크가 더 촘촘하게 사회와 개인을 둘러싸서 안팎의 구별이 모호해진 현대, 예술의 형식을 바꿈으로서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사유가 다시 보인다. 정치와 예술의 만남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부작용 없이, 현실과 상호 작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예술인의 치열한 창작은 현실 도피가 아닌 돌파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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