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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관람 ‘노동’ 시대의 관람자

곽노원

전시를 봐야 한다는 부채감에 항상 쫓긴다. 누구도 그 빚을 실제로 독촉하지 않지만, 미술계의 일들을 업으로 삼는 이라면 공감할 만한 압박감이 아닐까. 비엔날레가 돌아오거나 대형 페어가 열리지 않더라도 관람의 빚은 미술인에게 복리처럼 매해 늘어만 난다. 넓게는 각종 기금과 기관, 크고 작은 예술공간의 운영 사이클에 따라, 좁게는 개별 미술인들의 작업 사이클에 따라 한 해는 봐야 할 전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애써 작은 상환이라도 하려 전시장을 찾으면, 전시 내 작품의 시간은 전시가 내보임을 허락한 시간을 훨씬 뛰어넘어 축적되어 있기 일쑤다. 전시에 연계된 행사만을 얼추 그러쥐어 보려 해도 캘린더를 들쑤시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관람은 ‘노동’이다.1)

문제는 전시를 보는 일이 자신의 생산에 직간접적으로 결부되지 않은, 소위 감상이 목적이라는 ‘일반 관람객’에게도 전시 보기가 노동에 가깝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일반’ 관람객으로 상정된 이들은 일상과 다른 이벤트를 유희적으로 즐기는 ‘구경꾼’이라 주장할 수도 있고, 따라서 전시도 그저 수많은 볼거리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시는 그 많은 볼거리, 소위 콘텐츠 중 하나 또는 여타 ‘콘텐츠’ 중에서도 특정한 시간에 맞추어 특정 공간까지로의 발걸음을 전제로 하는 꽤 품이 드는 볼 ‘내용’이지 않은가. 물론 이러한 체험성은, 벌써 아연한 팬데믹 이후 국공립기관을 필두로 미술계 전반에 요청되기 시작했던 전시 연계 ‘콘텐츠’의 생산으로 반박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홍보나 아카이브를 목적으로 또는 보다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매개되기 위해 전시가 온라인을 통해 보는 이의 ‘눈앞에’ 전달된다고 말이다.



J.R. EYERMAN(1906-85), The Eye of Life - 
Spectators attending the 3D screening of the film Bwanda Devil at the Paramount Theater.
Hollywood, California, USA, 1952 - Black and white photograph (on view 70×55cm)
출처: drouot.com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런 의미에서 전시를 보는 일은 시각예술의 ‘전문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노동’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면 우리 모두에게 무엇인가를 보는 행위, 즉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가 시간의 투자, 바꿔 말해 ‘돈’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주목 경제로 비약적으로 요약해 볼 수 있는 동시대 경제-사회적 원리는 전시 보기 행위란 과연 ‘노동’인가 또는 그 ‘노동’ 후에는 어떤 가치가 남느냐는 ‘이상한’ 질문을 궁극적으로 야기한다. 시각적 주목을 끌거나 투자하는 것 자체가 자본을 창출하거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구조 내에서, 전시 ‘콘텐츠’의 가치는 구독자로 대변되는 시청자와 그들의 보기 행위-시간이라는 양적인 차원으로 소급되며 관람 경험의 가치 역시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되게 한다. 따라서 이 ‘구경꾼’, 보고 떠나가는 ‘손님’으로서의 관람객의 주의 투자는 시각 예술생산/매개자의 결과물을 향유하는데 지급돼야 하는 당연한 대가로, 내보임의 사건이 무한히 수평적으로 증식할 수 있게 해야만 하는 전제된 자본으로 상정된다. 하지만 시각예술에 ‘좋댓구알’을 남길 얼마나 많은 ‘구독자’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팽창하기만을 반복하는 전시-생산의 구조는 기이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시 ‘소비자’, 나아가 ‘사용자’라는 전시 보는 이에게 시각예술 생산-매개자와의 구분적 짝패로서 부여된 수동적 ‘주체성’조차도 여전히 그들의 보기 행위를 시간-주의 투자로 치환시키며 보기 경험을 시각예술 생산-매개에 유용되는 잉여가치로 환산 가능케 한다. 그렇다 해서 생산-매개자의 손에 이끌려 ‘시각예술’이란 무대 위로 다시 올라오거나, 또는 해방을 기다리는 ‘관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전히 경계가 분명한 무대 바깥에서 스스로의 보기 권력을 행사하는, 스스로의 보기 행위를 인지하고 보기 경험을 가다듬어 가는 행위자를 발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들의 발견은 무대 안과 밖 양쪽에 속할 수 있으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거나, 오히려 무대 밖을 향해 스스로를 위치하려는 관람자를 주목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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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혜진은 영상이 주가 되는 오늘날 전시 양태에 따라 단순한 유희적 감상을 넘어선 분석과 논평이 전제된 전시 관람이 ‘노동’에 가까운 일이 되는 문제점에 대해 다음의 글에서 적확히 지적하고 있다. 문혜진, 「관람 노동의 시대와 동영상」, 『미술세계』 (2017년 5월호), pp. 45-47.


- 곽노원(1989- ) 구 기획자 집단 ‘불량선인’의 일원(2017-19)으로 ‘관악구 조원동 1645-2’(2017), ‘땅따먹기 ‘n’ P’(오퍼센트, 2019) 등 전시 공동 기획.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 학예연구사(2021)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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