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지역 미술사에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광주전남 미술사가 내게 특별한 까닭은 내가 자라나면서 미술가의 꿈을 키운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의재 허백련이나 오지호와 같은 거장은 물론 그 이름조차 통사에 올리지 못한 채 잊혀간 숱한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이가 있을 거라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모르는 이름이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2015년 11월 어느 날, 너무 낡은 <노안도> 10폭 병풍을 해체하던 표구점에 마침 내가 들어섰는데 배접한 신문지 사이에서 전남 영광국민학교 학생들의 일본 제국 황군(皇軍)을 찬양하는 크레파스 그림들이 보였다.
나는 <황군 전쟁화> 때문에 병풍을 구입했다. 일제강점기 미술사상 처음 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뒤 저 <노안도>에 찍힌 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故고재식(칸옥션 대표)에게 질문했다. 그는 ‘可石(가석)’과 ‘武靈居人(무령거인)’이란 글씨를 읽어주면서 ‘무령(武靈)’은 전라도 영광(靈光)의 옛 이름이라 했으니까 영광에 머무는 가석이란 사람이라고 답변해 주었다. 하지만 당시 광주전남 미술사에 가석이란 아호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한 적이 없는 이였으므로 일본사람이 아니었을까 의심도 해 보았다.
김도숙, <매화>, <묵죽>,《 사군자 8폭 병풍》 중, 1939년 이후, 종이, 각 89.3×34.2cm, 최열 소장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났다. 저 가석(可石)이란 인물의 <사군자 8폭 병풍>을 구할 수 있었다. 뜻밖이었다. 게다가 그 가석은 김도숙(金道淑, 1872-1943)의 아호였으며 김도숙은 1907년 호남 최대의 의병장 심남일(沈南一, 1871-1910)과 함께 고향 나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서 도통장(都統將)에 취임, 눈부신 활약을 전개한 의병이었던 것이다. 김도숙은 1909년 10월 심남일과 더불어 체포당해 7년의 옥고를 치른 뒤 1916년 석방되었고 향리에서 3.1민족해방운동에 나섰다가 전남 일대를 유랑하던 중 순천에서 생애를 마쳤다. 바로 그 유랑지의 한 곳이 영광이었고 이곳에서 그린 작품이 바로 <사군자 8폭 병풍>이었던 것이다.
그의 <묵죽>은 적의 심장을 향해 쏟아내는 총탄과도 같고 <매화>는 의병에서 물러나 처사(處士)의 생애를 살아가는 이의 아득한 마음과도 같다. 하늘을 향해 내지르는 함성이 마치 터지는 폭죽과도 같은 그 <묵죽>이며 한없이 부드럽고 평온한 <매화>는 식민지가 되어버린 공동체의 운명을 견디는 은일지사의 생애 그대로인데 이토록 멋진 기운이 넘치는 작품과 그 세계를 토해낸 화가를 사후 80년이 넘도록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왔으니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미술사학을 한다는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