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영희 / 모태의 양면성과 생명

이선영

모태의 양면성과 생명

 

이선영(미술평론가)



[자연(Nature) 예술(Art) 사람(Human) 설악산 현대미술 프로젝트 2023 : 재탄생 설악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전시는 작가 12명이 각각의 공간을 정해서 열린 개인전의 성격을 가진다. 모텔처럼 공간이 칸칸이 나뉜 건물은 개별적이면서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전시 장소로 적합하다. 연결은 단절을 전제하고, 이는 개인 작품도 마찬가지다. 미술계 현장에서 실제로 거주하는(또는 거주했던) 이러한 성격의 공간은 전시장뿐 아니라 레지던시, 아트페어가 열리는 장으로 전용되곤 한다. ‘하늘정원’이라는 간판이 아직 걸려있는 유명 관광지 근처에 자리한 벽돌 건물은 한때의 객실 기능을 뒤로하고 현대미술을 위한 대안공간으로 탄생했다. 재탄생은 이전의 작업을 장소특정적으로 설치한 이영희의 작업에도 공통된다. 작가는 건물의 여러 곳 중에서도 낡음의 기운이 더 강하게 남아 있는 반지하 공간을 선택했다. 원래는 모텔 1층의 반지하 식당 자리였으며, 나지막한 천정의 방 두 개가 붙어있는 자리다.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1_1



입구가 붙어있는 반지하 방 2칸은 처음에는 거의 흉가 같았지만, 남은 벽지와 장판 다 뜯고 작업했다. 천정 가까이에 붙어있는 창문은 전기도 안 들어왔던 공간에서 유일한 빛의 창구였다. 작가는 10년 넘게 굳게 닫혀 있었을 반지하의 창문을 열자 쏟아진 먼지에서 그 공간의 숨통을 틔워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일은 꽁꽁 포장해 놓았던 자신의 작품에서도 일어났다. 이곳에서의 작품 구상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오래된 작업을 떠올리게 했다. 이 전시에서 진행된 인터뷰(2023. 4. 7)에서 ‘이곳에 설치된 [물러선 대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주로 작업해 온 뿌리를 달고 날아오르는 대지의 파편들_틈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밝힌다. 그림처럼 사각형 형태의 프레임 안에 부풀어오르는 듯한 울룩불룩한 굴곡 면이 있으며, 때로 물을 품은 산처럼 여백도 품고 있는 대지 형태의 작품들은 이번 전시에서 벽에 걸려있거나 비스듬히 기대어 설치되어 있다. 바닥에도 깔린다.


다양한 양태를 대지들은 허름한 공간 분위기와 연결되어 부패로 부풀어 오르는 살 또한 연상시킨다. 이 대목에서는 대량생산과 소비 사이에 끼어 신음하는 온갖 살들의 희생의 모습도 겹쳐진다.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순환에 더한 또 다른 생산/소비의 순환이 가속화되고 있는 시대에 이영희의 작업은 삶에 포함된 죽음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한다. 하지만 심연으로의 가라앉음의 비상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이영희의 땅/살은 부풀어오름과 찢어짐 사이에 생명의 씨앗을 품는다. 씨앗들은 생태적 조건을 따라서 위아래로 줄기를 뻗는다. 바닥에 설치되는 작품은 입체 형태 아래에 푸른 섬유질 형태가 매달려 있다. 화면과 땅을 중첩시키는 방식과 땅이 바깥으로 비져나온 형태가 공존하며 여기에 실제 흙도 가세한다. 이영희는 유사 이래, 의미심장한 상징이었던 땅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만든다. 작가는 몇몇 작품에서 화면의 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재현과 무관할 수 없다.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entrance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1



이영희의 작품은 재현적으로 구성되는 평면이기보다는 야생의 대지같은 면모를 띈다. 평면 형식의 작품들은 생성의 장이며, 설치작품을 통해 프레임 바깥으로 나온다. 대지는 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여성의 노동을 상징하는 단편들이다. 단편들은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동질이상(同質異像)의 형태 때문에 분리와 융합을 거듭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자체로도 물활론적인 대상으로 나타난다. 생명의 모태를 연상시키는 이영희의 대지들은 신비하면서도 기괴하다. 모태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생명과 달리,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함이 특징인 모태는 삶과 죽음 양극단을 뫼비우스 띠처럼 활주한다. 이영희의 작품 속 자연-대지-몸-식물성이라는 연결망은 여성적 상징과 밀접하다. 특히 이번 전시와 관련돼서는 ‘더러움’이라는 속성이 가지는 이중성을 파고든다. 현실과 상식을 지배하는 이원론 속에 타자화된 항인 여성/육체/자연은 그 내부에도 이중성이 존재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두 가지 육체를 비교한다. 그에 의하면 그 하나는 히브리어의 육신과 가까운 것으로 법칙의 엄격함에 대항하는 탐욕스러운 충동의 육체다. 다른 하나는 가라앉은 육체로서 영적이므로 공기 같은 육체인데, 성스러운 말씀 속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이 되기 위해 완전히 역전된 육체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육체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 후자의 승화된 육체는 전자(법칙에 도전하는 까닭에 도착적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같은 체제의 안과 밖처럼 도착성과 아름다움을 하나의 본질로 모은 것이 기독교의 천재성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크리스테바는 위협적이지만 영양을 공급하는 이질성으로서의 모성은 신약 이후의 텍스트와 후세의 신학에서 죄 많은 육체로만 각인될 뿐이라고 평가한다. 죄로 넘쳐나는 육신에는 남녀가 따로 없지만, 그 뿌리와 그 근본적인 재현은 여성에 할당된다는 것이다. 여성/육체는 이질적이다. 즉 타자이다.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1_2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1_4



이영희의 작품에서 프레임 바깥으로 부풀어 오르는 듯한 대지의 형태는 한도를 넘어선 욕망 즉 탐욕스러운 육체가 향하는 몸 또한 떠올린다. 하지만 더러움은 생명의 조건이며, 크리스테바가 말하듯이 아름다움과 죽음의 결합이야말로 글쓰기의 조건이다. 주체는 지배적 질서인 상징계에 속하기 위해 어머니로부터 분리를 강제당한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아버지라는 제 3자와의 동일화는 어린아이를 어머니 육체와의 접촉으로부터 떼어내어서 그를 다른 차원의 주체, 즉 욕구 불만과 부재를 넘어서 언어활동이 펼쳐지는 상징적 차원의 주체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공포의 권력]도 신과 말하는 존재가 분리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풍요한 어머니라고 말해진다. 분리란 어머니의 환상적인 힘으로부터의 분리와 같다. 이 시원적인 대모신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신교와 싸우는 한 민족의 상상 속에 나타난다. 대지는 정신적인 천상에 대조되는 물질이다.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학자들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의미작용을 하는 대상을 구축해야 하며, 주체는 더럽혀진 모성을 상기함으로서 분리를 통해 여성과 남성, 즉 ‘개인’이나 ‘고유한’ 조직화의 근간으로서 점차로 의미작용이 되고 합법화한다. 법칙을 만드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남근 상징적인 본능이다. 자연-여성-어머니의 이미지가 은유적으로 표현된 이영희의 작품에서는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상징계의)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에 내재한 공포까지는 아니어도, 기괴한 분위기가 깔린다. 하지만 공포도 배제되지는 않는다. 흉가 같은 반지하 방 모퉁이에 쌓아 놓은 흙은 마치 무너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공간 전체에서 진행 중인 변화에 가속도를 붙인다. 구조로부터 벗어난(또는 무너진) 흙은 생명을 품음으로서 부정적 이미지를 일소해 나간다. 무엇인가 흙화(化) 됨은 죽음과 생명이 연결을 알리는 지점이다. 공사장에서 잠시 쌓아 놓은 흙에서도 잡초들은 금새 번성하지 않는가.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1_5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1_7



‘순수가 오염됨’(메리 더글러스, 줄리아 크리스테바)으로서 생겨나는 불경함과 신성함은 자율적 주체의 반대편에 자리한 모성적 존재의 특성이다. 크리스테바는 ‘내가 그 속에 삼켜지고 취해버리는 상징화할 수 없는 어떤 것, 차라리 멀리에서부터 배제된 의미의 바깥인, 그래서 더욱 시원적이고 불가능한 비(非)장소, 타자인 어머니’라고 모성적 실체를 정의한다. 크리스테바는 [밤의 끝으로의 여행](셀린)의 예를 들면서, ‘삶을 주는 자이면서 삶을 빼앗는 자, 이렇듯 셀린의 어머니는 또한 아름다움과 죽음이 결합하는 야누스’라고 말한다. 대상과 깔끔하게 나누어질 수 없는 주체는 여기저기 유목하는 존재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서구의 강박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그 누구도 자기 집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나는 욕망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야 말로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을 기술하는 정확한 표현이라고 본다. 욕망은 무의식적일 뿐만 아니라 사유의 행위를 지탱해 주는 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점 때문에 사유의 핵심 부분에서 비(非)사유로 남아있다. 


[유목적 주체]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유일한 지표는 우리의 욕망이라고 결론 내린다. 욕망하는 존재는 경계 사이에 있다. 스스로 경계들의 틈 사이에서 작업해왔다고 말하는 이영희에게 이번 전시작품에서도 선명한 경계의 침식은 모성의 특징을 나타낸다. ‘혼돈의 과학’을 지지하는 철학자 미셀 세르는 ‘모든 것이 구별 없는 덩어리로 시작된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것에서는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분리에서는 어떤 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혼합물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왕겨와 본드를 이용하여 꿈틀거리는 듯한 대지 형태를 만들었던 계기는 1998년에 장흥의 한 미술관에서 장마철에 전시를 하다가 물이 들어차는 바람에 받은 황토의 꿀렁꿀렁한 느낌에서부터다. 이영희는 예전부터 자신에게 불리한 여건을 역이용해왔다. 이번 공간도 흙이 들이 찬 듯 한 압박감과 축축함이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작가의 작업실 작업대 밑에 있었던 작품들의 포장을 열었더니 다시 싹을 트는 듯했다.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1_detail



옆방은 작품의 포장지를 그대로 설치하고 흙과 보리의 싹을 보탰다. 새 작업을 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설치작업은 작품 속 실제로 자라고 있는 식물들이 포함되며, 봄부터 진행되어 석 달 동안 열리는 전시회에서 작품을 조금씩 변형시키는 중이다. 조형적 대지와 함께 바닥에 설치된 흙의 틈들에 심어진 보리싹은 전시 기간 내내 관객이 물을 뿌려주는 참여를 기다린다. 작가는 큰 숲도 작은 풀 한 포기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말한다. 대지 형상의 작품은 원래는 큰 규모였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작은 작품들이 나왔고 그래서 틈들이 더 강조된다. 그 중에서 큰 틈은 길이 된다. 남녘에서 강원도까지 공수해 온 붉은 황토 20자루도 활용되었다. 인공대지와 실제 흙은 서로를 지지하면서 재탄생의 공간에 몸통을 이룬다. 거뭇거뭇한 곰팡이 자국이 남아 있는 벽에는 사각 형태의 대지 작품들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바닥에서 일어나 들썩거리는 듯한 대지의 연출에는 잠재적 움직임이 있다. 


물론 그것은 새가 날아가는 듯한, 화산이 분출하는 듯한 빠른 움직임이 아니다. 길거리 가로수가 점점 자라면서 뿌리 밑둥이 단단하게 포장된 시멘트 구조물을 들어 올리는 것 같은 오래된 시간의 축을 따르는 움직임이다. 작가는 보이지 않게 서서히 진행되는 자연의 움직임으로 극적으로 표현한다. 이영희의 작품에서 대지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상징, 요컨대 안정감 있는 삶의 터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지는 들쑤셔지며, 생명의 힘에 의해 들썩거리고 입자는 부스러지거나 다시 뭉쳐지는 중이다. 그러나 ‘대지’가 생명을 품고 있는 모태라는 점은 연속적이다. 이영희는 작품 또한 이러한 자연의 양태와 중첩시킨다. 하지만 자연스러움을 연출하기 위한 작업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난관의 연속이다. 자연스러운 예술이라고 자연처럼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작가는 잘 정리된 화이트 큐브와 정반대 공간의 약점을 활용했다.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1-2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2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2



이전 전시에서는 파편화된 대지가 날아오르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는데, 이번에는 거의 뜯겨져 나간 천정과 내려앉은 듯한 바닥 때문에 방향성이 모호해졌다, 오히려 작가는 작품이 물러서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는 전시 부제 [물러선 대지]가 오래된 방으로부터 온 인상임을 밝힌다. ‘벽지는 이미 벽지랄 것도 없이 검고 푸르스름한 검버섯을 피우고 제각각 들뜬 각질이 되어 빽빽이 덮혀 있었다....모든 것이 바닥 아래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둠 속으로 물러서고 있는 중이었다.’ 언젠가 솟구쳤다면 내려오는 것도, 언젠가 펼쳐졌다면 접히는 것도 순리일 것이다. 작가는 대지 아래에 식물 형상의 구조를 내려뜨려 잠재적 움직임의 동인을 암시한다. 땅덩어리 아래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은 면, 마 실과 면 로프 등을 염색해서 만든 뿌리다. 투명 플라스틱 지지대 때문에 아래에서 쑥 올라오는 느낌이며 높이는 제각각 다르다. 그 작업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겪어왔다. 생명처럼 역사를 가진다. 


같은 작품도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발현된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작업 초기에는 광목, 가제 천, 삼베, 모시 등의 천연섬유를 황토 등으로 염색하고, 자연물, 솜, 바느질과 연계한 설치작업을 해왔는데...2000년대 이후부터는 왕겨, 즉 벼를 품고 있었던 빈껍데기가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버무린 왕겨 더미들은 대지의 파편들과 같은 형태를 띠고, 갈라진 대지의 틈과 틈 사이의 싹, 그 싹의 뿌리로 상징되는 태모시, 목실, 꼰사 등을 염색한 실 등으로 대지 아래 생명의 뿌리를 달고 날아오르는 틈의 연작 설치작업을 해왔다.’고 밝힌다. [물러선 대지] 전은 이전 작업을 대안공간 설악에 재맥락화시킨 것이다. 실내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곰팡이가 가득하며 먼지가 풀풀 날리던 그곳에 작가는 이전의 황토 작업을 이식했다. 십 수 년 전 전시가 끝난 후 작업실 안쪽에 포장되어 있던, 왕겨와 목공 본드를 섞어 만든 대지의 시뮬라크르였지만, 황토와 같이 배치되어 죽어가고 있던 공간을 재생시켰다.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2_3_detqil



동시에 자신의 이전 작업에도 공기와 물, 그리고 새싹을 보태어 생명을 다시 불어넣었다. 물론 이영희에게 생명은 삶뿐 아니라 죽음까지 포함한다. 작가는 전시장이 되기 직전의 오래된 방을 들여다 보면서 ‘그대로 멈춘 것은 어떠한 것도 없다’고 느꼈다. ‘모든 것들이 진행 중’이었다. ‘멈춘듯한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사라져가느라 치열하게 애쓰는 중이었다’. 그래서 작업이란 그 장소 고유에 내재된 시간성을 가속시키거나 완화시키는 등의 변형을 통해서 그 시공간을 극적인 사건으로 만든다. 선적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에게 사라짐의 이면은 생겨남이다.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다. ‘곰팡이 가루가 날리고, 검푸른 검버섯 흔적’이 선명한 벽면에서 작가는 ‘돌아가시기 전 무수히 피어있던 어머니 살갗의 검버섯들’을 본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사라져가는 사물을 들여다보는 것은 삶을 들여다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라지는 하늘정원의 공간처럼, 누구에게나 다가올 그 시간들, 사라져 가는 시간들에 가까이에서 따뜻한 숨결을 보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라짐에 대한 담담한 애도’이기도 하다. 전시를 하기 위해 기본 청소를 하는 것 외에 공간은 뼈대에 붙여진 살처럼 변형되고 있었다. 상처난 살도 치유되듯이 갈라진 대지들이 연결망을 이루고 작은 새싹들이 자라나 숲을 이룰 수 있을 것같다. 벽에 기대진 사각형의 대지들은 마치 못자리처럼 계속 공급될 수 있는 대지의 단위처럼 보인다. 사각형은 전형적인 그림의 틀거리인데, 작가는 작품을 대지와도 같이 생각한다. 대지는 영감의 씨앗을 받아 정성으로 가꿔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작가는 시작하고 과정에도 열심이지만, 결과까지 자신하지는 않는다. 작품은 어느 시기에 일단락됐어도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오래된 건물이 회생했듯이 오래된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2_detail



그것들은 새로운 파종을 위해 갈아엎어지며 갱신된다. 작품은 작가의 산물이지만, 제작하고 발표하는 시공간의 맥락들이 있기 때문에 낯설기도 하다. ‘원래의’ 작품은 매번 타자로 나타나며, 지속적인 조율과 또 다른 착상을 요구받는다. 단절된 시공간은 새로운 연결망의 전제조건이다. 존재가 아닌 과정인 주체는 자명하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다. 그것은 예술이 단순한 현실 반영이 아님과도 같다.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는 어두운 방의 이미지, 즉 어둡고 축축한 반지하 공간은 마치 무의식으로 하강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집을 ‘인간에게 안정의 근거와 그 환상을 주는 이미지들의 집적체’로 보는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수직적인 존재로 상상되는 집에서 지하공간은 무의식에 해당된다고 본다. 이 어둑한 곳으로 내려가기 위해 촛대가 필요하다. 지하공간은 ‘땅 속에 묻힌 광기이고 벽 안에 갇힌 드라마’(바슐라르)이다. 


실제로 반지하에서 살았던 경험도 있다는 작가에게 오랫동안 굳게 닫힌 문을 여는 행위는 작품의 시작이자 자아 탐사의 시작이다. 자신은 출발이 아니라 목적이다. 그래서인지 전시장은 다소 어둑하게 연출됐다. 190cm 정도의 낮은 천정은 동굴같은 느낌도 든다. 설치물 사이의 공간이 길이 된다. 조명을 세 개만 설치해서 관객은 비치된 손전등을 들고 탐조하듯이 관람하게 된다. 바닥에 설치된 작품을 아래를 바라보게 하며 관찰자의 그림자는 자연화되고 있는 야생적 공간에서 크게 드리워진다. 작업이든 작가든, 현실이든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작업은 자신 안의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그 면모가 밝혀진다. 물론 대화는 말처럼 쉽지 않다. 자아와 초자아가 발달한 잘 교육받은 교양인에게 타자는 억압되고 길들여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 어둡고 눅눅한 구석들은 계몽의 빛에 의해 낱낱이 밝혀지고 그럼으로서 소유되고 기능화 되어야 한다. 




물러선 대지 The land of standing aside, youngheelee, 2023, mixed media, installation ,R2_detail_1



이영희는 작업을 통해 이렇게 감추어진 부분을 들춰낸다. 알폰소 링기스는 [낯선 육체]에서 ‘타자에게 반응한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에 용감히 맞서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현존하는 모든 것의 매혹적인 물질성’(알폰소 링기스)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린 타자,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정화 내지는 승화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정화나 승화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출발선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뤄내야 하는 이상이다. 주체가 되기 위한 여정에서 자명한 것은 없다. 이영희에게 예술 또한 이미 도달한 이상의 재현이 아니다. 언제 어떻게 도달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가고 있는 과정이다. 현대미술은 이러한 과정에 실험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여줬다. 실험은 무균의 실험실같은 화이트 큐브만이 아니라 자연에서도 일어난다. 그러한 실험은 이번 전시 공간처럼 야생화되는 과도적 공간에서 더욱 활발하게 펼쳐진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