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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ROSA) / 비워낸 몸, 도래할 몸

이선영

비워낸 몸, 도래할 몸

 

이선영(미술평론가)

 

로사는 금속 선으로 몸을 짠다. 뜨개 바늘로 특정 모델도 없이 떠나간다. 모든 것이 동원되는 몰입적 작업에서 작품이라는 의식적 산물에 무의식 또한 같이 짜여진다. 편물과 비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실로 연속적으로 짜여지는 것은 아니다. 짜기의 여정에는 여러 가지 방식의 만남이 나타난다. 반복적인 수행적 작업 속에 개인의 무의식은 물론 사회의 무의식도 스며든다. 작가가 여성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이 개입된다. 로사에게 몸은 초기부터 작업의 중심에 놓였는데, 초창기에는 사회적으로 읽힐 수 있는 몸이 있었다면, 이제는 거의 종교적 차원에 접근해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사회적인 것이 현생에 집중되어 있다면, 종교는 죽음이나 그 이후도 염두에 두는 보다 긴 시간의 층위를 전제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이 무의식에는 시간성이 없다고 했지만, 생로병사를 통과하는 인간의 시간은 다르게 다가온다. 작가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전의 작품에 대해 ‘여성성에 대한 고민,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기억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재료: copper wire. size: 인체는 150~170㎝ 사이



하지만 몸은 의식이나 이성에 의해 쉽게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작업을 할수록 깨닫게 된 듯하다. 로사는 자유롭게 작업하지만, 여성적 형태가 나오는 것은 사회적 차원이든 종교적 차원이든 작가의 성과 무관치 않다. 감추고 억압하려 할수록 드러나는 것이 성이다. 유방이나 생식기 부근의 형태, 그리고 여성의 의상이 합쳐진 형태들에서 여성은 선명하다. 초기 작품에는 코르셋이나 드레스 등 명백히 여성적인 의상 아이템들도 활용되었다. 피터 부룩스는 [육체와 예술]에서 성이란 단순히 생식능력뿐 아니라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아의식을 형성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욕망과 금지의 복합물 모두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성은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는 환상과 상징의 복합물이며, 육체란 바로 미와 쾌락과 가치가 깃들인 장소이다. 물론 로사의 작품은 익명성과 관련된 불확실성도 존재한다. 


다만 확실하지 않음, 경계의 모호 등 자체를 여성적인 속성으로도 볼 수 있다. 해부학적(그리고 그것에 바탕한 심리나 상징)으로도 여성의 성은 남성에 비해 불확실하다. 여성은 기념비적이 아니라 심연의 존재였고, 그래서 불길하거나 신비롭게 여겨진다. 피터 부룩스는 여성의 육체를 자연에 속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문화로는 해석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태도는 가부장적 사고에 공통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남성 관찰자 일반이 경험한 문제는 여체의 시각적 불투과성의 문제다. 피터 부룩스는 에밀 졸라의 작품의 [나나]를 든다. 여기에서 여자의 나체는 결코 완전히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작품 속 여주인공 나나의 성기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욱 강력하다. 그에 의하면 여성의 성기는 알 수 없는 무엇이며 따라서 서술적 역학의 원동력이 된다는 생각 역시 남성적 관점의 표현이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지배는 항상 미심쩍은 것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여성이 여성을 표현할 때는 어떠할까? 얇다 못해 반투명한 몸을 떠올리는 로사의 작품에서 몸은 표면, 또는 중층적 표면이다. 그것은 뫼비우스 띠처럼 안팎이 연결된다. 구리의 물성은 중층적 표면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짜여지는 몸은 본질이 아니라 텍스트다. 자연에 원형을 둔 본질과 달리, 텍스트는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예술과 이론에서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이동은 예술과 예술가의 위상에도 미세한 변화를 야기했다. 텍스트 이론은 ‘저자의 죽음’(롤랑 바르트)을 야기했다. 저자만 죽었을까? 인간은 어떨까? 만약 그 인간이 말처럼 ‘보편적’이 아니라, 하나의 성만을 대표해 왔다면, 여성이 만든 작품에서 ‘인간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근본적인 질문은 미술대학을 다닌 적 없는 여성작가의 작업이 보다 묵직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텍스트는 다시 짜여질 수 있다. 텍스트는 열려 있다. ‘본질’은 경계가 확실하며 만약 그것이 ‘열려’있다면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상처나 훼손, 병적 증후를 암시할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존재의 특징은 열려 있으면서 닫혀 있다. 피부의 숨구멍이나 보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세포막이 그렇다. 성글 성글하게 짜여진 로사의 작품은 바깥과의 소통 창구를 좀 더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 사물이 아닌 생명체에게 바깥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거나 바깥과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죽음을 말한다. 살아있는 존재는 보다 유연하다. 바깥과의 연결은 유동적이며, 그것은 유기체의 항상성을 유지하게 한다. 로사는 유기체에게 가장 확실한 기준이기도 한 몸을 짜기, 역시, 이질적인 것과 접속하기 등을 통해 유연하게 다룬다. 의상뿐 아니라 작은 구슬과의 접속은 몸의 안팎을 드나들 미시적인 입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열려있는 텍스트로서의 인체는 약한 존재를 강조한다. 2022년에 열렸던 개인전 부제가 ‘몸; Vulnerable’인 것은 몸의 상처받기 쉬움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Vulnerable’ 전 이후에 연속적인 의미의 개인전 ‘corpus/말뭉치’는 자연과 문화 사이에 끼어 있는 몸에 대한 고민이 포함되었다. 작가는 몸과 담론을 나누지 않고 동시에 생각한다. 하나는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이라는 이항대립이 아니다. 피터 부룩스는 언어적 기표의 힘이란 언어를 표현하는 육체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육체를 나타내는 언어의 힘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육체의 중요성을 주장한 프로이트를 인용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재현을 통해 육체를 인간의 기호학적, 의미론적 세계 속에 포함시킴으로서 육체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반대로 언어는 육체를 원초적 지시대상으로 하는 상징체계가 되려고 한다. 즉 물질적 실체가 있는 언어로 거듭나려고 한다. 


작가는 벌거벗은 육체 그 자체 보다는 의미가 각인 되는 장소로서의 육체에 더 관심을 가진다. 피터 부룩스에 의하면 육체에 기호를 새긴다는 것은 육체가 글쓰기의 한 부분이 됨을 뜻한다. 우리는 육체에 관한 기호보다 육체를 나타내는 기호를 갖고 있다. ‘Vulnerable’ 전에서 작가는 ‘정신만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나이가 들고 육체적으로 약해지니 몸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다’(부산일보와의 인터뷰)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 몸은 보다 불투명해진다. 군살이 붙고 병이 붙는다. 하지만 약함은 동시에 강함이다. 온전한 유기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로사의 찢겨지고 잘라진 단편들은 더 이상 망가질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기관없는 몸’을 주장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각에 의하면, 거대 유기체야 말로 취약한 존재다. 유기체는 텍스트처럼 해체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 무엇이든 깊게 뿌리내릴 수 없는 현대적 조건 속에서 단편들의 횡단적 연결체인 리좀은 틈 속에서 번성하는 방식이다. 












단편들은 다른 단편들과 엉겨 붙어 새로운 활로를 찾는다. 금속 자체는 강한 물질이지만, 그것이 0.3mm 굵기의 선이 되면 거의 실과 같은 재료가 된다. 인간의 몸속에는 얼마나 많은 실뭉치가 기관의 안팎을 감싸면서 작동하는가. 가슴, 발 등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여러 개 매달려 있기도 하고 의상의 형태로 걸려있기도 하다. 마로 짜여진 작품은 보다 육중한 느낌이며 바닥에 설치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담는 몸의 위상을 알려준다. 하지만 로사의 작품에서 몸은 정신을 담기 위한 도구에 한정되지 않는다. 부분들은 유기체 특유의 질서감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대로 있으며 그만큼 단편들의 관계 또한 유동적이다. ‘기관없는 몸’의 양상인 단편들은 자유롭게 접속하며 나아간다. 이때 단편들은 연결에 대한 잠재성을 가지기에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다. 머리가 붙은 상반신 아래에 유방 하나가 열매처럼 매달려 있기도 하다. 


반투명한 구조물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조합을 가능하게 한다. 유기체 자체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만큼 로사의 반투명 구조물은 겹침을 통해 그러한 층들을 강조한다. 텍스트는 매번 새로이 맥락화되고 질감을 가진다. 로사의 작품에서 몸은 견고한 덩어리가 아니라 장(場)이다. 니콜라스 미르조예프는 [바디스케이프]에서 재현의 과정에서 신체는 그 자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로 나타나기에, 신체는 하나의 대상이기보다는 영역라고 본다.이 맥락에서 로사의 작품을 보면, 몸의 외관은 하나의 경계가 아니라 교환점이다. 요컨대  ‘시각적 기호에 의해 매개된 교환의 장소’(미르조예프)이다. 기호가 교환되는 몸은 정치적이다. 미르조예프는 그 예를 1차 대전에서의 패배의 분열로부터 남성 신체를 재구축 하고자 했던 나치에게서 보면서, 페미니즘 역시 중요한 정치적 신체의 영역이라고 강조한다. 로사의 작품 속 몸은 그러한 정치적 몸처럼 전형적이지는 않다. 












작가는 사회적 차원에서 굴레가 되었던 몸을 해체하고 싶어한다. 장으로서의 몸은 사물과의 접속을 더 용이하게 한다. 레깅스 같은 밀착 의상은 몸과 옷의 구별이 없기도 하지만, 로사의 작품은 혼돈스럽다. 속옷같은 끈 아래에는 유두가 분명한 유방이 자리한다. 몸은 레이스 무늬 선명한 실제의 여성 속옷의 연장으로도 나타난다. 목부분 부터 깊게 갈라지는 형태는 그것이 의상이 아니라 몸일 경우에 반전의 이미지가 된다. 결합된 여러 금속 중 로사가 주로 사용하는 구리 선은 여러 금속 선들 중에서도 피부와 가장 비슷하며, 시간에 따라 칙칙하게 변하는 양상 또한 그렇다. 작가가 활용하는 금색 은색 흑색 등의 금속은 화려한 장식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금속은 여러 장신구의 형태로 착용되며, 피어싱 등의 형식은 금속과 살의 직접적인 접속을 꾀한다. 원시시대로부터의 전통이 있으며, 세계 여러 문화유산에서 부장품 등으로 많이 발굴된다. 


금속이 아닌 사기질 형태의 오브제들이 결합 된 경우에는 배치를 통해 의미를 암시한다. 손, 머리, 생식기 등 주요 부위는 다른 재료로 보다 실체감 있게 표현되어 그물망 구조에 배치된다. 하지만 로사의 작품에 불가피한 그물망적 구조는 원시뿐 아니라 현대 가상 현실의 몸 또한 떠올린다. 가상현실 속 몸 또한 껍데기처럼 떠돌지 않는가. 가상현실은 몸의 위상을 뒤흔든다. 그에 비견되는 존재는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다. 몸과 의상의 접속에 의한 혼돈은 유기체와 사물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며,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상품이 지배하는 물질문명의 강력한 추세다. 모델의 몸매가 거의 마네킹처럼 통일되어 있거나 뚱뚱한 여성들이 입고 다니지 못하게 일정 사이즈의 옷만 만드는 회사 같은 경우는 몸을 사물화하는 비판받아 마땅할 예다. 하지만 유기체의 사물화는 불가역적인 추세가 됐다. 작가는 이렇듯 순수하지 못한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아니 그런 현실을 더욱 가속화하면서 질문한다. 구멍이 숭숭 뚫린 몸의 단편들은 이중의 불완전성을 보여준다. 매달려 있는 상태는 중력에 최소한으로 반응하는 가벼움을 말한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게 가정되어온 자율이나 자유의 가치에 대해 회의한다. 인간은 프란시스 베이컨이 정육점에서 보고 소스라쳤던 매달린 고깃덩어리처럼 보인다. 유사 이래 매달림은 고문이나 처형이나 자살이라는 비극적 상황과 관련되지 않았나? 특히 그물망 신체 구조가 많이 걸려있을 때 군상같은 느낌을 주며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전달한다.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적 누드의 안정감과 묵직함을 생각해 보라. 가령 원이나 사각형 같은, 플라톤주의적 기준에 의하면 이데아의 세계 속에 존재할 신성한 기하학에 꼭 맞게 표현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Vitruvian Man]은 소우주와 대우주가 중첩되는 중심을 내포한다. 누드는 단순한 몸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체계가 투사된 상징적 우주로 간주되었다. 


입체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케네드 클라크는 [누드의 미술사]에서 미켈란젤로는 누드 상이 지닌 신적 성격을 확신하고 고대미의 완벽성을 추구했다고 말한다.(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대작 [최후의 심판]에는 죽은 성자 몸 껍데기에 자신과 닮은 얼굴을 합성했다는 해석도 있다) 케네드 클라크에 의하면 매너리즘 시대에 와서 고전적 체계가 해체된다. [누드의 미술사]에 의하면 고대에 기원을 두었던 누드 상들은 갑자기 북방의 열병같은 격렬함을 띄었다. 매너리즘의 반(反)고전적인 기묘한 비례들은 에로틱한 환상을 드높였으며, 고전주의는 형해만 남아서 미술학교에서 무익한 수업용 교재로나 쓰였고 통속화된다. 케네드 클라크에게 남성 누드의 쇠퇴는 누드 그자체의 쇠퇴와 동일시된다. 재현된 여성의 몸은 누드가 아니라, 그저 알몸이었던 것이다. 형이상학적 체계가 해체된 몸은 욕망의 대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누군가는 이성 자체에서 욕망을 보지만 말이다. 






 재료: 마실



 재료: copper wire, antique beads





피터 부룩스는 르네상스가 고대를 모방하면서 남자의 육체가 일반적 육체, 즉 세계의 기준으로 강조됐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남성의 육체는 그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결코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탐구의 주체이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자로서 여성은 대상화 되었지만, 이제는 남성 역시 그 추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동일자의 중심에는 타자가 있고, 역전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로사의 작품같은 현대미술은 그러한 중심이 상실되어 있다. 하지만 부정만으로 예술이 가능하지는 않다. 파괴는 생성의 전제 조건이다. 비워낸 몸, 단편화된 몸은 충만한 연결을 지향한다. 새로운 짝짓기는 새로운 태생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뱀 허물같은 작품의 구조들은 그것이 새로운 탄생의 흔적임을 암시한다. 한편으로 투명 낚싯줄에 매달려 설치된 작품들은 낚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허공에 낚싯대를 던지는 듯한 맹목성이 있음을 고백한다. 


작가는 ‘매번 작업의 얼개가 짜지면 잠시 숨을 모으고 공중에 힘껏 낚시줄을 휙 던져보는’ 상상을 한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아스라이 날아가는 낚시줄에 무엇이 걸려올 지 알 수는 없다. 헛손질의 막막함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질문하고, 사유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반복적인 과정에서 그 막막함은 공중에 한 점을 뚫을만한 단단하고 날카로운 바늘을 갖게 되고 드디어 낚시 바늘에 제법 무게를 느낄만한 무엇이 매달려져 내려온다.’고 말한다. 노동집약적인 작업이기는 하지만 특정 형태나 의미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과정이 중요하다. 작가는 46세에 연극영화과에 입학할 정도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화할 수 없음이 병이 되고, 스스로를 편안하게 두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자학적인 면모다. 이번 전시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로사가 몇 번의 전시를 통해 발표한 그림은 초현실주의적이며, 초현실주의의 매저키즘적 특징을 보여준다. 들뢰즈는 매저키즘에 대한 한 연구에서 힘(권력, 폭력)이 가해지기 직전에 멈춘 존재의 긴장감에서 매저키즘적 환상을 본다. 




니딩한 인체를 연출해 찍은 사진작품들



여성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분위기이다. 설치작품에서는 회화에서와 같은 압박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뜨개질이라는 보다 여성적 노동의 방식이 적용된 설치작품은 좀 더 자유롭고 융통성 있다. 자동적인 실행은 무의식의 영역을 더욱 활성화시킨다. 작가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탓으로 돌렸지만, 회화에 끼어드는 서사적 요소는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압박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로사는 회화, 사진, 설치, 요즘에는 목판화까지 새로이 시도하는 등 매번 자신을 제로 베이스에 놓고자 한다. 이번 전시를 포함해서 최근 몇 년간 집중적으로 발표한 설치작품들은 작가에게 몰입의 체험을 주었다. 정교한 계획보다는 일단 시작하면서 생겨나는 발상들과 지속되는 과정이 중요하다. 청사포 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서 작가는 ‘구체적인 계획 없이 몸의 감각에 맡긴 채 첫 코(사슬)를 시작으로 몇 날 며칠을 밤낮없이 홀린 듯 손을 움직였다. 그러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내 몸의 크기와 비슷한 여인이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반복을 통한 차이가 쌓임을 실감한다. 로사에게 알지 못함, 익숙하지 않음은 주저함이 이니라 추진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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